개구리 소년 사건
날짜 | 1991년 3월 26일 |
---|---|
시간 | 불명 |
위치 | 대구광역시 달서구 와룡산 중턱 |
좌표 | 북위 35° 51′ 52″ 동경 128° 31′ 15″ / 북위 35.864341° 동경 128.520702° |
원인 | 둔기로 인한 두개골 손상 |
최초 보고자 | 최환태 |
참여자 | 미상 |
결과 | 2002년 9월 26일 와룡산 세방골 중턱에서 등산객의 신고로 실종자의 유골 발견 |
사상자 | |
5명 사망 | |
사망자 | 김종식, 박찬인, 김영규, 조호연, 우철원 |
매장지 | 대구 와룡산 중턱 |
조사 | 2006년 3월 25일 공소시효 만료 |
개구리 소년 사건은 1991년 3월 26일에 대구광역시 달서구에 살던 5명의 성서초등학교 학생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실종된 사건으로[1] 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 이형호 유괴 살해 사건과 함께 3대 미제 사건 중 하나이며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이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고 왜곡된 것이 초기에 널리 퍼지면서 "개구리 소년"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2] 사건 발생일인 1991년 3월 26일은 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된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하여 기초의회 의원을 뽑는 시·군·구의회 의원 선거일로 임시 공휴일이었다.[3]
사건
[편집]5명의 초등학교 학생이 그것도 같은 날 동시에 실종된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사건 발생 2년 후인 1993년에는 KBS 1TV의 사건 25시와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심층적으로 방영되면서 ��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공중전화 카드, 엽서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어린이 만화 비디오테이프 등까지 대대적으로 캠페인이 전개되면서 남녀노소 대부분이 이 사건에 대해 인지할 정도였고 당시 정부는 경찰과 군인 등을 35만명 투입하여 현장 주변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불구하고[4] 뚜렷한 성과 없이 미제 사건으로 묻히는 듯하다가 사건 발생 11년 6개월만인 2002년 9월 26일에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 뒤쪽의 와룡산 중턱에서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었으나[5] 끝내 아이들의 사망 원인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2006년 3월 25일 24시에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면서 미제사건으로 남았으며[2] 당시 수색한 경찰과 군인 등 35만명은 확실하게 수색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공소시효 만료 이후에도 범인을 찾기 위하여 형사들이 개구리 소년 사건을 담당하는 대구성서경찰서와 대구광역시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이 구성되어 있다.
사망 아동 명단
[편집]다섯 아이들은 다음과 같다.(나이는 1991년 실종 당시의 나이이다.)[6][7]
- 우철원 (禹喆元, 1979년생, 6학년, B형+) 보호자: 우종우, 장명자
- 조호연 (趙浩衍, 1980년생, 5학년, B형+) 보호자: 조남환, 김순녀
- 김영규 (金榮奎, 1981년생, 4학년, B형+) 보호자: 김현도[8], 최경희
- 박찬인 (朴燦印, 1982년생, 3학년, B형+) 보호자: 박건서[9], 김임자
- 김종식 (金鍾植, 1983년생, 3학년, O형+) 보호자: 김철규[10], 허도선
생존 아동 명단
[편집]생존 아이는 다음과 같다.
- 김태룡 (1982년생, 사건 당시 초등학교 3학년)
(그는 어머니가 ‘너무 멀리 나가서 놀지 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산 정문까지만 아이들을 쫓아가고 아침밥도 먹을 겸 돌아갔다고 한다.[11])
사건에 대한 논란
[편집]유골 발견
[편집]2002년 9월 26일에 와룡산에서 도토리를 줍던 한 시민이 유골을 발견하였고, 경찰은 유골들이 한군데 엉켜 있었고 현장에 구덩이의 흔적이 없는 점으로 보아 체온이 떨어져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5] 하지만 유골 감식을 맡은 경북대 법의학팀은 두개골 손상 흔적 등을 근거로 아이들이 타살되었다고 주장했다.[2]
하지만 범인은 끝내 찾지 못하고 2006년 3월 25일자로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수사가 종결되었다.[2]
총격에 의한 타살설
[편집]구두닦이 일을 했던 한 아무개씨(43·대구 달서구)가 2002년 9월 28일 대구경찰청에 "2002년 7월에 30∼35세의 남자 1명이 구두를 닦으면서, ‘군생활 당시 어린이 5명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말을 했다"는 제보를 했다.[12][13]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군부대에서 사격은 적어도 10∼20명이 단체로 실시하고 있다”면서 “더군다나 이들 인원이 오발에 의해 사고가 났다면 10여년 동안 그 사실이 묻혀 있을 수 있겠느냐”며 가능성을 부인했다.[12]
미흡한 수사
[편집]헛소문들
[편집]1992년 8월에 경찰에서는 "실종 소년들이 경북칠곡군 모 집단 거주지 건물 지하에 암매장 돼 있다."라는 신고를 듣고 한센병 환자촌을 수사하였다.[14] 이에 일부 주민들이 취재를 위해 방문한 간부 2명을 포함한 기자 12명을 감금했다가 밤 늦게 풀어주는 소동이 있었다.[15] 1996년 1월에는 경찰이 아이들을 김종식 군의 아버지가 죽여 집에 묻었다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프로파일러인 김가원 씨의 고집센 주장이 있다면서 김종식 군 아버지의 집 마당, 화장실, 구들장을 임의로 발굴해 물의를 일으켰다.[16]
경찰의 잘못
[편집]아이들의 유골을 발굴할 때도 유골을 분석하여 사인을 밝혀낼 법의학자의 도움 없이 성급하게 작업을 진행하여 현장을 훼손하는 등 실종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놓쳤다는 비난도 받았었다.[17]
특히 2002년에 유골이 발견되었을 당시 경찰은 유골들이 한데 엉켜 있었고 현장에 구덩이의 흔적이 없는 점으로 미뤄 어린이들이 추운 날씨에 길을 잃고 헤매다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가 체온이 떨어져 숨졌을 것이라 주장했다.[5] 그러나 유골 감식을 맡은 경북대 법의학팀은 두개골 손상 흔적 등을 근거로 아이들이 타살되었다고 주장했다.[2]
같은 학교에 당시 초등학교 4학년 함승훈 군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와룡산 바로 밑 군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그는 이날 다른 무리의 동네 형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가 형들과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산 위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날카롭고 다급한 비명소리를 두 차례 들었다, 이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까, 11시 30분쯤 되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성인이 된 함 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였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은 묵살했다.
사건 당일인 1991년 3월 26일 서구 중리동에 위치해 있던 가축 도살장(現 퀸스로드 쇼핑몰) 인근 버스 정류장에서 아이들이 버스를 같이 타는 걸 목격했다는 여성의 제보가 있었으나, 경찰은 묵살되었다.
영구 미해결 사건
[편집]이 사건은 이형호 군 유괴 살해사건과 함께 증거부족으로 영구 미해결 사건이 된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다.[2] 하지만 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은 2019년 9월 18일 진범으로 특정된 용의자가 나왔고, 2019년 10월 1일 용의자인 이춘재가 모든 범행을 시인하고, DNA 검증까지 마치면서 사건이 종결되었다.[18]
조호연 군의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던 청년이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놀라'라고 핀잔을 줬다. 사건이 일어난 후, 이 청년은 인터뷰에서 나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다며 눈물을 흘리면서 자책했다고 전해진다.
대중문화 · 미디어
[편집]- 유골 발견 이전 (1991년 3월 ~ 2002년 9월 24일)
- 1991년 ~ 1992년 광고 LG생활건강 슈퍼타이[19] 제품에 대구 개구리소년 찾기 광고, 슈퍼타이 세제 뒷면에 개구리소년 찾기 사진 기재된 제품 생산
- 1991년 5월 MBC 여론광장 개구리소년 찾기 방송
- 한국통신(현 KT) 공중전화 카드 뒷면 개구리소년 찾습니다 내용 기재된 카드 발급
- 오리온 초코파이 뒷면 개구리소년찾기 제품 출시
- 1991년 서진 꿈돌이 만화 비디오
- 1991년 5월 5일 한국담배인삼공사(현 KT&G) 출시 담배제품 88라이트 담배갑에 개구리소년 찾습니다 내용 기재된 담배갑 1천만갑 생산
- 개구리소년 찾는 사진 기재된 쥐포(현재 폐업한 회사라 정확한 회사 사명 불분명함) 생산
- 1991년 대한생명(현 한화생명) 개구리소년 찾기 캠페인, 고객 책자 DM에 개구리소년 찾기 사진 기재된 책자 발매
- 1991년 주택은행(현 KB 국민은행) 개구리소년 찾기 캠페인
- 1991년 KB 국민카드 개구리소년 찾기 캠페인 실시, 카드대금 명세서 뒷면에 개구리소년 찾기 사진 기재
- 1991년 8월 20일 《개구리 잡으러 간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대구 성서국민학교 다섯어린이 실종 사건 이야기. 도서출간 글쓴이 이기창
- 1991년 한진그룹 개구리소년 찾기 전단 배포 및 전국 영업 운송망 동원해 개구리소년 찾기 캠페인 전개
- 1991년 태평양화학(현 아모레 퍼시픽) 미용전문사보 향장에 대구개구리소년 찾기운동 실시 보상금 1천만원 회사에서 기탁
- 1991년 KEB 하나은행 개구리소년 찾기 전단 배포
- 1991년 11월 3일 KBS1 《가요무대》 - 개구리소년 찾는 사연 쇼
- 1992년 영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개봉[20]
- 1992년 1월 동아생명(현 KDB생명) 직원용 사보 동아생명, 고객서비스 책자 파랑새에 개구리소년 찾기 사보 매달 개제 발매
- 1992년 2월 동원산업 동원 양반김에 대구 개구리소년 찾기 사진 개제된 제품 생산 출시
- 1992년 3월 대구시 교육청에서 개구리소년 찾기 전단 22만부 제작 배포
- 1992년 5월 14일 주간조선 개구리소년 납북설 보도된 주간조선 발매
- 1993년 3월 21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 실종, 개구리 소년
- 1993년 3월 28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 대구 개구리 소년
- 1993년 4월 23일 SBS AM 트롯대행진
- 1993년 6월 26일 KBS2 《사건 25시》 - 공개추적, 개구리 소년 실종 853일
- 1993년 9월 23일 개구리소년 5명 부모들 아이들 찾기 포기하고 생업 복귀한다고 선언
- 유골 발견 후 (2002년 9월 26일 ~ 수사 종료까지)
- 2002년 10월 5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 끝나지 않은 미스터리 / 주검으로 돌아온 개구리 소년
- 2003년 5월 14일 힙합 가수 MC 스나이퍼 2집 앨범 《초행》 중 〈개구리 소년〉이라는 노래가 수록됨(3번 트랙).
- 2005년 9월 이 사건에 대해 전 카이스트 교수가 쓴 실화소설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 출간.
- 2011년 2월 17일 영화 《아이들...》개봉
- 2022년 7월 19일 MBC 《PD수첩》 - 와룡산에 묻힌 진실
- 2022년 3월 26일 《아이들은 왜 산에 갔을까?》'개구리 소년 변사사건' 30년 추적기. 김재산 출간
- 2024년 1월 11일 SBS《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991 개구리 소년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이주영 (2006년 3월 22일). “"아이들 살해된 이유라도 알고 싶다"”. 연합뉴스TV. 2021년 5월 3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라 마 바 윤희정 (2021년 3월 26일). “‘개구리 소년’ 사건 30년 지났어도…유족에겐 ‘미제사건’”. KBS. 2021년 5월 3일에 확인함.
- ↑ 남승렬 (2021년 3월 25일). “개구리소년사건 30년…“죄 없는 어린 아이들 왜 죽였는지 이유만…””. 뉴스1. 2021년 5월 8일에 확인함.
- ↑ 우성덕 (2021년 3월 27일). “30년 된 미스터리…대구 개구리소년 수사는 여전히 '진행 중'”. 매일경제. 2021년 5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1년 5월 8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정용균 (2002년 9월 26일). “‘개구리소년’ 5명 유골 실종 11년半만에 발견”. 동아일보. 2021년 5월 3일에 확인함.
- ↑ 박영출; 장석범 (2006년 3월 25일). “우리가 모방한 日法 ‘공소시효 15년’”. 문화일보. 2021년 5월 3일에 확인함.
- ↑ 이승욱 (2002년 9월 30일). “"탄두 부식심해 91년 이전 사용 추정"”. 오마이뉴스. 2021년 5월 3일에 확인함.
- ↑ 2022년 4월 22일 뇌경색으로 별세
- ↑ 2023년 5월 6일 급성뇌경색으로 별세
- ↑ 2001년 10월 간암으로 별세
- ↑ 조미진 (2015년 10월 24일). “미제사건의 재구성② 대구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주간현대. 2017년 9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1년 5월 10일에 확인함.
- ↑ 가 나 김상조 (2002년 10월 1일). ““개구리 소년 총기살해” 제보”. 국민일보. 2021년 5월 8일에 확인함.
- ↑ 권기준 (2002년 9월 30일). “'개구리 소년' 총기 살해 제보”. KBS. 2021년 5월 8일에 확인함.
- ↑ “"개구리소년 암장"제보 경찰 수색작업”. 동아일보. 1992년 8월 21일. 2021년 5월 10일에 확인함.
- ↑ 안영수 (1992년 8월 22일). “"암매장 보도 명예훼손"”. 한겨레. 2021년 5월 10일에 확인함.
- ↑ 김세화 (1996년 1월 12일). “김가원씨, 개구리소년 집안에 암매장 주장, 무위로 끝나[김세화]”. MBC. 2021년 5월 10일에 확인함.
- ↑ 강민진 (2018년 3월 26일). “27년 전 오늘 ‘개구리 소년’ 실종…미스터리는 풀리지 않았다”. 한겨레. 2021년 5월 8일에 확인함.
- ↑ 임수정; 최효정 (2019년 10월 2일). “경찰 "이춘재 총 14건의 살인·30여건 성범죄 자백"…신상공개 등 대응 검토”. 조선일보. 2021년 5월 10일에 확인함.
- ↑ 당시에 생산 · 판매된 슈퍼타이 제품 뒷면에 실종 어린이들의 사진이 실렸다.
- ↑ “<영화계소식>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 개봉”. 연합뉴스. 1992년 10월 26일. 2021년 5월 10일에 확인함.
- ↑ 당시 나이 최병훈(6세), 최창수(7세), 오윤한(7세) 등의 28일만에 생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