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23장
기둥 옆에 우산을 세워놓고 마루 끝에 걸터앉아 주인의 나오기를 기다리는 최만경은 일찌기 보지 못하던 젊은 안손님이 왔다는 말을 노파에게 듣고 가슴 속으로는 벌써 분한 마음이 불길같이 솟아오르는데, 초조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며 급한 마음으로는 당장에 쫓아가서 그 동정을 살펴보리라 하는 생각도 없지 아니하나 얼마간 나머지 체면을 차리고 간신히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수일의 나오는 모양은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하고 그 방안에서는 사람의 기척이 없다. 최만경은 더욱 참지 못하여,
『여보 할멈, 한 번만 더 가서 여쭈어보구료. 오늘은 정말 급한 일이 있으니 잠깐만 뵈옵고 가겠다고.』
『글쎄요, 어째서 가서 여쭙기가 어려워요. 무슨 이야기인지 대단히 은근하게 하시는 모양이야요.』
『내가 그런다고 내 말 전하는 데야 어떨 것이 있소?』
『그러면 한번 더 여쭈어 보지요.』
하며 노파는 부엌 뒷문으로 좇아 수일의 거처하는 방으로 가서 문을 열지 아니하고,
『나리, 나리.』
『여기 계시지 않소?』
듣고 대답하는 사람은 손님 부인의 목소리라. 노파는 그제야 문을 열고 들여다본다.
『아이 참, 어디 가셨네.』
실로 주인은 없고 베개머리에 앉아 있는 손은 오히려 설워하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여 흐트러진 머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어 올리면서,
『지금 막 나가셨는데요.』
『네, 지금 나가셨어요?』
『지금 나가시길래 거기 손님께로 가시는 줄 알았지요.』
『아니 오셨어요. 저기 계신 손님도 급한 일로 잠깐만 뵈옵고 가겠다고 하셔서 또 여쭈러 왔는데요. 그러면 어디로 가셨을까?』
노파는 다시 문을 닫치고 최만경 앞으로 오며,
『지금 이리 나오셨다던 걸요.』
『할멈도 거짓말을 그렇게 하오? 이리 오신 양반이 어디 가셨겠소?』
『아무렇든지 그 방에는 계시지 아니해요. 손님 혼자만 앉아 계셔요.』
『그러면 어디를 가졌단 말이요? 어디로 가서 몰래 숨으신게지.』
『아이고, 망측하여라, 숨으시기는 왜 숨으셔요? 뒤 보러나 가셨나요.』
하며 노파는 그곳을 향하여 찾으러 간다.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어느 곳 한 군데도 빠치지 아니하고 찾아보았으나 도무지 형적을 알 수 없는 고로 다시 돌아와 그 연유를 최만경에게 말한다. 최만경은 오히려 노파의 말을 믿지 아니하는 모양으로,
『공연히 나를 속이지 말고 바른대로 가르쳐주구료.』
『아이고, 아씨도 망령이시구료. 내가 무슨 이해가 있어서 거짓말을 해요. 아마 우리 나리는 뒷문으로 하여서 어디를 가졌나 보아요. 이 할미 말을 정 믿지 아니 하시거든 뒷방으로 아씨가 가서 보시구료. 그랬으면 제일 시원히 아실 것을.』
최만경은 오히려 지금껏 앉아서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든지, 홀연 아무 말 없이 몸을 벌떡 일으켜 신발을 발끝에만 걸치고 뒷방으로 향하여 간다. 순애는 지금까지 정신을 잃고 앉아 있다가 홀연 찬란한 서양옷을 입고 분연히 들어오는 미인을 바라보고 속으로는 깜짝놀라며 자리를 고치어 한편으로 피하여 앉는다. 최만경은 잠시라도 잊지 못하는 수일의 얼굴을 보고자 하여 이에 이르렀거늘, 의외에 덕국한 사람이 방안에 올연히 독좌(獨坐)하였는데 자기보다 나이도 젊어 보이고, 자기보다 아름다우며, 자기보다 태도도 있으며, 자기보다 단정도 함을 보매 미운 생각과 분한 마음이 일시에 치밀어 올라온다.
이 여자가 옆에 달려 있으므로 정다운 마음은 모두 이 여자에게 쏟아주고, 그 외의 다른 사람은 눈꼬리로도 보지 아니함이로다 하는 생각이 우러나며, 칼날같이 독한 마음은 그 자리에서 그 여자를 찔러죽일 듯이 가슴이 뛰고 살이 떨려 체면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덤벼 싸움이라도 시작할 듯하다. 순애는 적이 무료하여 부끄러움을 머금었는데 잎새에 가리어 늦게 피어있는 꽃과 같이 벽 그림자에 은근히 가리워 있다.
최만경은 앞으로 와락 나가 앉으며,
『우리는 처음으로 뵈옵습니다마는 본래 주인양반하고 알으시는가요? 일가간이 되십니까?』
밉게 여기는 사람을 괴로이 구는 최만경의 첫째 수단이라.
『바로 친척은 아니라도 친척이나 다름이 없지요.』
『네, 그런데 인제야 처음 뵈와요. 나는 최만경이라는 사람이올시다. 여기 주인양반하고는 연래로 지내오는 정리가 여간 설면한 친척 보다는 낫게 지내지요. 피차에 서로 손을 빌어서 도와 지내지요. 그러나 당신은 어찌하여서 오늘이야 만나뵙겠소.』
『녜, 그 동안에는 서울 있지 아니하고 노상 시골만 가서 있었지요.』
『네, 그러셨으니까 못 왔습니다그려. 시골은 어디야요, 먼데오니잇가?』
『저, 평양 근처에 가서 있었어요.』
『그러면 지금은 어디 계십니까?』
『모교(毛橋) 근처에서 삽니다.』
『녜, 그러하신 것을 나는 조금도 알지 못하였습니다그려. 그러나 이수일씨는 전에 나더러 말씀이 자기는 친척도 없고, 친절하게 사귄 사람도 없고, 단지 외로운 내 한 몸 뿐이니 일평생을 가도록 우리는 친척과 같이 정다이 지내자고 하시기에 나는 과연 그러한 줄로만 알고 믿었지요. 지금 당신 말씀을 들으니까 어디 그렇습니까? 당신 같은 양반이 모두 계신 것을 공연히 숭증을 부리고 숨겨 말할 것이 무엇이요? 그 양반은 어떠한 때는 그렇게 남 대해서 말하듯이 서어하게 하는 일이 많아요.』
순애는 비로소 의심이 가슴에 가득히 일어난다.
(부친이 일찌기 병원에서 이상히 보았다 하던 여자가 필연 이 여자를 보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하며 또는 손이 왔다 함도 기짓 꾸미어 하는 말이요, 실상은 은근히 서로 만나 지내는 아내로 하여금 나보라 하는 듯이 내 눈앞으로 내보냄이 아닌가 의심하여,
(전일에 부친이 하시던 말씀이 적실하도다. 이 몸이 이 자리에 오늘날 오래도록 앉아 있음이 오히려 불길하리니, 차라리 오늘은 일찌기 돌아감만 못하리로다. 그러나 어느 곳에든지 몸을 숨기고 있는 그 사람은 이 몸이 돌아가는 모양을 엿보았다가 홀연 어느 문으로 다시 들어와서 이 여자의 손을 붙들고 자리를 한가지 하여 가련한 이 몸의 흠절을 웃어가며 꾸짖고 욕하리니 오늘날까지 그 사람을 위하여 쌓았던 탑이 개미의 무리로 인하여 기울어짐과 같으니 이 몸의 어리석음이 더욱 많도다.)
『모처럼만에 이렇게 오신 것을 별안간에 일이 생겨서 사람이 와서 지금 여쭈러 갔으니 이다음 날이라도 다시 또 오십시오.』
업수이 여기는지 비웃어 함인지 가려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을 밀어 보냄에서 다름이 없는 최만경의 말을 순애는 분한 마음을 억지로 혀를 깨물고 참으며,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당신도 볼일이 계신 모양인데 오히려 방해가 되어서 불안하오이다.』
『아니올시다, 천만에. 나는 일상 서 있다시피 하는 사람이니까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마는, 당신은 모처럼 오셨다가 너무 안되었습니다그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 다음이라도 또 뵈올 때가 있겠지요.』
하며 순애는 일어선다.
『아이고, 가시렵니까? 지금은 비가 과히 오지는 않습니다마는…….』
『밖에 나가다가 인력거 하나 불러서 타고 가지요.』
『아이, 그러면 안녕히 가셔요.』
두 여자는 서로 미워하며 서로 분하여 칼날 같은 마음을 가슴에 품고 미구에 선전조칙(宣戰詔勅)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질 듯하였더라.
수일은 두 여자의 괴로움을 피하여 비를 무릅쓰고 이웃 친구의 집으로 가서 늦도록 바둑과 장기로 해를 보내고 불켤 때에 임하여 비로소 자기의 집으로 발길을 향하였더라.
이날 수일은 아침도 입에 대지 아니하고 종일 동안을 번민히 지내다가 이제는 그 여자 등이 모두 돌아가고 있지 아니하리라 하여, 의심치 아니하고 대문을 들어서며,
『할멈 할멈, 저녁 다 지었나? 아이, 배고파.』
노파는 반가이 마루로서 내려오며,
『아이고, 어디를 가���었습니까? 아까부터 어떻게 찾아 다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아침도 아니 잡수시고 오죽 시장하실라구요.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오. 진짓상 가지고 올라가겠습니다.』
수일은 저녁을 먹고자 하여 방문을 밀고 들어서니 등잔불 아래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추인다. 수일은 의외에 사람이 앉아 있음을 보고 자세히 살피니 이는 곧 최만경이라. 그러나 벽을 향하고 돌아앉아 있으며 말이 없다. 수일은 홀연 눈살이 찌푸려지며 그 길로 다시 나와 자기의 거처하는 뒷방으로 돌아가며, 노파를 불러 저녁을 그리 로 가져오라 하며 밥상이 다 맞도록 반드시 쫓아오리라 생각하였던 최만경은 이윽토록 오는 기색이 없다.
수일은 도리어 다행히 여기어 먹기를 마친 후 아침부터 피로하였던 몸을 펴고, 영창에 비추이는 월색을 향하여 담배를 피우고 있다. 구태여 잊지 못하여 함은 아니로되, 놀랍도록 파리한 순애의 얼굴은 완연히 눈에 사무치며 애원(哀怨)하던 음성은 머리 위로 지나간 모기 소리와 같이 오히려 귀 안에 남아 있다. 지금에도 나의 집을 떠나지 못하고 어느 곳에 몸을 숨기어 있는가 하며 바람이 일어날 때마다 고개를 들어 살펴보는 수일은 창 앞에 서서 있는 오동나무 잎새가 흔들리는 그림자를 의심한다. 수일은 영창을 열치고 서늘한 서쪽 하늘에 걸리어 있는 초생달을 오동나무 틈으로 바라보니 수심에 싸인 수일의 얼굴은 희고 푸르게 비취어 더욱 근심이 가득하여 보인다.
『여보, 이수일씨.』
이미 한집안에 그저 있음을 잊어버린 최만경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바라본다. 평일에는 사람을 보면 웃음을 띄우고 추파를 보내더니, 이제는 눈꼬리는 위로 치키고 입살은 벌벌 떨린다. 수일은 마음으로 은근히 괴이히 여기며,
『아, 입때까지 계셨습니까?』
『녜, 있었습니다. 오전부터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한 줄은 몰랐구로. 대단히 실례하였소. 그러면 무슨 급한 일이 계신게구료.』
『급한 일이 없으면 당신 댁에서 좀 기다리지 못하오?』
하며 말하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데, 겁이 나는 듯이 놀라는 듯이 수일은 다만 최만경의 얼굴만 치어다보고 말이 없다.
『잘못하였소. 내가 잘못한 일도 아오. 재미있게 잘 노시는 것을 이 못된 년이 와서 파흥을 시켜드렸으니까 참 잘못하였소. 사람이 아무러기로 이리 할 수야 있소?』
하며 노기가 가득한 눈으로 수일의 얼굴을 원망하는 듯이 들여다본다. 수일은 최만경의 동작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별안간에 그것은 말씀이요?』
『지금 와서는 당신이 아무리 감추려고 하셔도 쓸데없는 일이야요. 젊은 사나이와 젊은 계집 두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바싹 붙어앉아가지고서 울었다가 웃었다가 조롱을 하였다가 하니, 그만하면 대강 눈치야 모를 사람이 어디 있소. 나도 저편 마루에서 동정을 대강 짐작하였어요. 한두 살 먹은 어린 아이가 아닌 바에야 그만 눈치야 아무러기로 모르겠소? 그리고 당신이 밖으로 나가신 후에 나는 곧 이 방으로 들어와서 그 여편네를 보았어요.』
어느 동리에서 강아지가 짖는가 하면 수일도 이에 이르러서는 무슨 말이 나오는가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
『그리고 내가 자세히 물어서 당신하고 그 여편네 하고 어떠한 사이로 지내는 것인지도 다 알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묻지도 아니하는 말까지 해서 아르켜줍디다. 오늘이야 당신의 재주가 얼마나 좋은지 알았소. 그렇게 어여쁜 여편네를 은근히 어따가 숨겨두고 혼자 재미있게시리 지내면서 남 보기에는 그런 등사에는 아주 범연한 체하지요. 어쩌면 그토록 시치미를 뚝 떼는지 당신 수단은 인제 알겠소.』
『그런 되지 못한 말은 그만 두오.』
『아무렴, 입으로는 저렇게 점잖은 체하지, 거기 들어서도. 벌써 저것 좀 보아, 그 여편네 생각하느라고 아무 정신없이……. 그렇게도 못 잊겠소?』
대답치도 아니하며 들은 체도 아니하고 다만 달빛을 향하여 담배 연기만 피우는 수일의 얼굴을 최만경은 이토록 들여다보기를 마지 아니한다.
『여보 수일씨, 그렇게 말도 아니할 것이 무엇이요? 그런 미인을 보고 났으니까 나같은 것은 데리고 말도 하기가 싫지요? 그런 줄은 나도 다 알았어요. 그러하기에 내가 길게 말도 아니할 터이요. 그러나 잠깐 물어볼 일이 있으니 그 말이나 대답하여 주시구려.』
수일은 비로소 눈을 최만경의 얼굴로 향하며,
『무슨 말이든지 어시 하시구료.』
『나는 당신을 죽여 없애고 싶어…….』
『무엇이야…….』
『당신도 죽이고 그 계집년도 죽이고 그 자리에서 나도 죽어버리고 싶어요.』
『그래도 할 수 없지, 그렇지마는 내가 무슨 까닭으로 최만경씨의 손에 죽는단 말이요?』
『까닭이요…… 그래서 그 까닭을 모르시겠소?…… 어떤 입으로 그런 말이 나올까요. 아이고 뻔뻔도 하지.』
『이게 무슨 소리야, 뻔뻔이라니. 어, 고약하고…….』
『고약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요? 너무 업신여기지 마오.』
하며 최만경은 지금껏 참았던 원통한 마음이 일시에 터지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흑흑 느끼며 울고 있다. 수일은 말이 없고 묵묵히 앉아서 동정만 살피고 있다.
『당신은 나를 그닥지나 미워하신단 말이요?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미워하시는지 그 까닭이나 좀 압시다그려. 다른 것은 모르더라도 그 까닭은 알고야 말 터이니까.』
『내가 언제 최만경씨를 미워하였단 말이요. 나는 그런 일이 없는데.』
『그러면 어찌하여서 나더러 고약하다고 말씀을 하오?』
『아, 어찌하여서 고약하지 않단 말이요? 그대에게 내가 죽을 일이 무엇이요? 나는 죽을 죄를 최만경씨에게 지은 일이 없는데.』
최만경은 두 볼에 솜둔 것 같은 얼굴을 지어가지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있고말고요. 확실히 있지요.』
『최만경씨 혼자 있다는 말이야 소용이 있소?』
『나 혼자만 알고 있으면 그만이지요. 내 마음으로 한 번 믿은 후에는 그대로 실행을 하지요.』
『그러면 나를 죽이겠다는 말이지?』
『내가 못 죽일 줄 아오? 좀 견뎌 보시오.』
『네, 그렇게 하시오. 그러면 내가 곱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요.』
하며 수일은 예사로이 대답한다. 서편으로 향하여 기울어져가는 달은 오동 사이로 비추이는데, 수은 같이 방울 방울 비추이는 밤 이슬은 방안에까지 사람의 몸을 침노한다. 수일은 영창을 닫고 남포의 불을 돋우며 다시 책상 위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벌써 밤이 매우 늦었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시구려.』
『너무 불안하오이다. 그토록 생각하여 주시니.』
『늦어가는 줄을 혹시 모르실까 하여서 깨우쳐 드리는 말씀이요.』
『어떻든지 고맙소. 그렇지마는 아까 낮에 왔던 사람 같으면 늦어가는 염려는 하여주지 아니하시지요?』
하며 수일을 미웁게 여기는 눈으로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대체 그게 웬 계집년이요 이전부터 좋아지내던 사람이라지요? 그 모양을 보니까 여염집 계집도 같지 않고 노는 계집도 아닌데, 당신은 대체가 이상한 물건을 좋아하시는구료. 그러나 여보, 그 계집이 임자 있는 곳이지요?……』
망령되이 하는 말을 대치 아니하리라 하고 함구하였던 수일은 마지못하여 하는 말로,
『글쎄, 어떠한 것인지 낸들 알 수 있소?』
『그런 계집을 데리고 지내면 재미가 더욱 시글시글하시겠지요마는 그러다가 한 번 몹시 속을 때가 있을 걸. 오늘날까지 쉬쉬 숨기고 있는 것도 나는 다 알고 있소. 무슨 낯으로 당신이 남더러 말씀을 하시겠소. 그렇지마는 그중 미워하는 내가 알아놓았으니 당신 마음에 오죽 분하시겠소. 당신이 나를 일상 구박하시는듯이 나도 인제는 당신을 구박 좀 줄걸.』
듣기를 다한 이수일은 실소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혹시 저녁을 먹지 아니하여서 헛것이 뵈는게구료. 미친 사람 중얼거리듯 할 제는.』
『녜, 나는 미쳤지요. 누가 나를 이렇게 미치게 하여 놓았소? 내가 미치기는 오늘 낮부터 미쳤소. 당신 집에 온 후부터 내가 미쳤으니 전과 같이 성한 사람으로 미친 병을 고쳐서 보내주오.』
하며 최만경은 수일의 앞으로 무릎을 내밀어 앉으며 조금도 나가려는 기색이 없다. 수일도 좇아서 몸을 점점 아래로 내려앉는다. 최만경은 굳이 좇아 내려오며,
『그리고 내가 한 마디 당신에게 물어볼 말이 있으니, 당신 마음속에 있는대로 말씀을 해야지 조금이라도 거짓말로 꾸며대면 안 되오.』
『어서 말씀을 하시오, 무슨 말이든지.』
『그렇게 시름없이 예사로이 알고 말하시지 말고 꼭 내가 묻는대로 대답하셔요.』
『아무렴, .그렇지요 묻는 말에 대답 아니하겠소?』
『그러면 내가 말씀을 하겠소. 바른대로 꼭 대답을 하여 주시오. 수일씨, 당신은 나를 귀치아니하여서 못 견디시지요? 나도 당신 속을 유리 붙이고 들여다보듯하고 있지요마는 알면서도 당신을 귀치않게 굴고 쫓아다니는 것은 진정으로 당신을 잠시라도 잊을 수가 없어서 그렇구료. 속담에 이른바 짝사랑이라 하는 것이요. 나도 가만히 생각하면 어찌하여서 내가 이렇게 어리석고 미련한가 하지마는, 하루라도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못 살 것 같으니 그를 어찌하오. 이런 미친 계집이라도 당신을 자나 깨나 못 잊어하는 줄을 아시지요?』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는 것이지.』
『남은 죽을 힘을 다 들여서 말하는데 그렇게 한푼 어치 들이지 않고 말하는 데가 어디 있소? 그렇기에 나는 골이 더 나 죽겠어.』
『그러면 어찌하라는 말이요? 어서 하던 말이나 다 마치오.』
최만경은 방금에 대성통곡이 나는 듯한 얼굴로 수일을 바라보며,
『내가 몇 해 동안을 두고서 여러 가지로 간절히 말씀을 여쭈어도 한 번도 들어주지 아니하고 이리 핑계 저리 핑계만 하니, 본래부터 나를 싫어하여서 그리하신 줄은 모르고, 정말 사정이 그러한가 하고 입때까지 속았지요. 본래 당신 성품이 괴벽하여서 여편네 등사에는 눈을 뜨지 않고 심히 범연한 양반인가 하고, 나 혼자 마음을 위로하고 지내면서 언제든지 당신의 마음이 돌아설 날이 있을까 하였더니 오늘 보니까 그게 다 모두 거짓말이고…….』
하며 수일의 무릎을 이로 악물고 꼬집는다.
『아야, 이게 무슨 짓이요? 아픈데.』
하며 최만경의 손을 뿌리치면 더욱 가까이 덤비어 두손으로 번갈아 가며 다닷치는대로 꼬집어 다린다. 수일은 무례히 덤비는 최만경의 두 팔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매 최만경은 고개를 숙이고 덤벼 수의 다리를 물어 뗀다. 수일은 기운을 다하여 물리치려 한즉 더욱 죽을 힘을 다하여 수일의 옷자락에 매달리며 느껴운다. 이에 이르매 수일도 다소 최만경의 동작을 미타히 여기어 또는 분노한 생각이 없지 아니하여, 최만경의 매달린 몸을 사정없이 뿌리치나 오히려 떠나지 아니하므로 수일은 더욱 분노함을 이기지 못하여 목자에 노기를 가득히 띄우고 꾸짖는 듯이 최만경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대체 어떤네의 행실로 이게 무슨 광패한 것이요?』
『……….』
『그리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아니 갈 터야.』
『아니 가…… 응, 그러면 내일부터는 여기 문안에 다시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만들어놓을 터이니 그러한 줄 아오.』
『왜 못 와요? 죽더라도 나는 올 터이야.』
『지금까지 내가 참고 있었지마는 인제는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으니까 이런 말을 찌레만에게 말끔 이야기하겠소.』
최만경은 그때야 비로소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며,
『예, 마음대로 하시오.』
『……….』
『찌레만에게 말을 한다시니, 말을 하면 어찌할 터이요?』
수일은 이를 악물고 최만경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며,
『나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아니 나오는구료. 찌레만이가 당신에게 어찌되는 사람이요.』
『수일씨는 찌레만이가 내게 어떻게 되는 사람으로 아시오?』
수일은 최만경의 말하는 입을 주먹으로 때려 터치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한다.
『수일씨는 찌레만이를 내 편으로 알고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지요마는 실상은 그렇지 않소.』
『그러면 무엇이란 말이요?』
『언제인지 당신께 말씀한 일도 있지요마는, 나는 우리 부모의 빚으로 하여서 전당으로 잡혀갔다가 나중에는 그만 이 모양이 되었지마는 바로 말할 것 같으면 찌레만이는 내게 원수라고 말하여도 관계치 않소. 남들은 나더러 찌레만이하고 내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내 마음에는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양반하고 내 마음대로 미치든지 좋아지내든지 아무 혐의도 될 것이 없습니다. 수일씨, 아무쪼록 찌레만이를 보시거든「최만경이는 내게 홀려서 귀치않게 일상 따라다니려고 하니, 우리 집 계집 하인으로라도 데려갈 터이니 그리 알라」고 말씀하여 주시오. 그리만 하여주시면 나는 일평생을 당신 댁에서 하인으로라도 지내겠소. 당신은 생각하시기를, 찌레만이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면 내가 겁을 내고 깜짝놀랄 줄이나 아시고 하신 말씀이지요마는 나는 왼편눈 하나 깜짝이지 아니하오. 무슨 일이든지 한 번 마음에 먹었던 일은 시험을 해보아야 하는 것이니까 당신 마음대로 하여보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 소문을 모두 퍼뜨려 놓겠소. 남편 있는 계집을 상관하여 가지고 밤낮으로 두 사람이 손목을 붙들고 이리저리 다닌다고 말을 내었으면 누가 더 낯이 뜨뜻하겠소?』
『아무리 속이 좁은 여자기로 그게 무슨 당치 못한 말이요. 사나이 하고 여편네하고 서로 앉아서 이야기만 하면 벌써 상관하였다고 말하오? 그리고 젊은 여자면 반드시 남편이 있는 법이요? 아무리 시기 많고 소견 좁은 여편네의 말이지마는 그러한 말은 좀 정신을 차려서 말을 하오』
『여보, 수일씨 이렇게 좀 바로 앉으시구료.』
수일의 손을 잡고 이끌매 수일은 잡은 손을 뿌리친다.
『이것은 웬 일이야?』
『귀���않지요?』
『물론이지요.』
『나는 이후부터는 더 귀치않게 하여드릴걸. 지금 당신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소? 시기 많은 계집이야요…… 당신이야말로 정신을 차려서 말을 조심하시오. 당신은 사나이가 아니오? 사나이는 사나이답게 눈정으로는 계집이 있을 것 같으면 광명정대하게 있다고 하시지, 공연히 그렇게 발명하실 것이 무엇이요? 나같은 계집은 당신이 아무 짓을 하든지 이리느니 저리느니 말할 권리도 없고 아무리 그런 말 한 마디라도 할 권리를 가지고 싶어도 그 권리를 당신이 주지 아니하시니까 할 수 있소. 그런데 당신은 무엇이 꺼리어서 나를 숨기려고 애를 쓰시오? 내가 진정으로 말씀 한 마디 하오리다. 당신이 아무리 밖에다가 열백 사람의 집을 두고서 거기 미쳐서 나같은 것은 조금도 생각지 아니하신다고 나까지 당신을 외단한 계집도 아니오, 또는 당신에게 크게 관계되고 해가 미칠 일을 소문내어놓는다 하기로, 내 소원이 성취할 것도 아니니까 당신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마는 나는 그닥지 마음이 고약한 계집은 아니올시다. 세상에다가 소문을 내어놓아서 당신의 낯을 깎아놓겠다고 말씀한 것은 단지 이 자리에서 잠시 미운 생각에 입으로만 한 말이지, 실상 마음으로는 조금치도 그런 마음이 있어서 한 말씀은 아니니 그런 줄 아시고 혹시 과도히 한 말씀이 있더라도 널리 용서하여 주시오. 이렇도록 내가 사죄합니다.』
하며 최만경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어 수일에게 사죄한다.
수일은 어찌하면 좋을꼬 하는 모양으로 다만 미간을 찌푸리고 머리만 긁는다.
『그리고 다시 내가 수일씨에게 소원이 한 가지 있소.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이 오늘날까지 가지고 계시던 마음은 그만 내버리고 남의 사정과 인정을 좀 알아주는 이수일씨가 되어주시기를 바라오. 당신 말씀 한 마디에 나도 좌우간 마음을 결단하겠으니 조금이라도 은휘하실 것 없이 생각하시는대로 말씀을 하여 주시오. 내 말씀을 알아들으시겠소…….』
하며 수일의 얼굴을 바라는 것이 있는 듯이 치어다보고 있다.
『지금 다시 새삼스럽게 말씀을 하지 않더라도 내 마음은 당신도 아마 깊이 아시겠지요.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로 말씀한 일이 많지요마는 당신은 한결같이 나를 싫어하셔서 나 하는 말씀이라면 쫓아가며 불청을 하시니까 나인들 억지로 어찌할 수 있소? 당신이 나를 그렇게 마땅치 못하게 아시니 나도 생각이 있지, 평생을 두고 당신에게 수치만 당하고 있겠습니까? 나도 아주 단념하여버리지요. 제가 제 말 하는 것 같아서 어찌 들으실지는 모르지요마는, 나도 아무리 조그마한 계집이라도 과히 결단성이 없지 아니해서 한 번 결단하면 다시는 요동하는 법이 없더니, 당신 생각하는 마음은 아무리 결심을 하여도 다시 생각이 나고 생각을 말자 하다가 문득문득 보고 싶어서 결단이 허사가 되니, 내가 내 생각을 하여도 계집이라도 그렇게 마음은 약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하여서 이다지 어리석고 못낫는고 하는 생각이 납니다그려. 내가 별반 남에게 홀리는 일이 없는데 당신에게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홀린 것이 분명하구요. 그러하니까 다만 내 마음이 그러한 줄 실상으로 알아주시면 내 소원은 그만하여도 다 풀릴 듯하오. 이토록 깊이 마음을 먹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당신은 조금도 생각하여 주지 아니하시니 실상을 생각하면 당신과 나와는 성질이 맞지 아니하여 그러한 것이니 어찌할 수가 있소? 당신에게 그렇게 수치를 당하면서도 차마 잊지 못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가긍하오. 가령 나는 마음에 불합하시더라도 그 간절한 심정은 가히 생각하여 주실만 하외다. 그리고 당신으로 말을 하더라도 결 단코 그만 정경을 모르실 양반이 아닌 줄은 오늘 낮에 보고 자세히 알았소. 연애라 하는 것은 남냐기 다를 것이 없고 피차가 없는 것이요. 남녀가 서로 다같이 마음이 있어서 피차에 정은 있으면서도 그 뜻을 무슨 사정으로든지 이루기가 어려우면 설우니 즐거우니 하는데, 황차 짝사랑으로 저 혼자 그 사람을 생각하고 사모하는 그 마음이 어떠하겠나 생각좀 하여보시오. 아까 말이 내가 당신을 죽이고도 싶다는 말이 나오지 아니하겠는가? 다 같이 이 세상에 사람으로 생겨나서 당신을 위하여서는 노예라도 될 것이요, 당신의 말씀 한 마디만 들을 지경이면 내 목숨이 없어져도 아깝지 아니하다고까지 생각하오. 그런 가련한 사정을 생각하시면 아무리 밉게 보시는 사람이라도 조금치라도 인정을 두어 주실 듯하오. 나도 당신에게 해로울 듯한 일은 바라지 않소. 다만 내 이 가슴이 시원히 풀어질 말씀 한 마디만 하여주시면 좋겠으니, 지금까지 어찌하여 지내어왔든지 가까이 알던 정분으로 한 마디만 말씀하여 주시구료.』
이렇듯 간절히 하는 최만경의 말소리는 점점 떨리어 평일의 목소리가 없어지고 진정한 마음으로 슬피 나오는 울음소리와 다름없다.
최만경은 수일의 이 말 한마디를 들으면 기천 원의 차용증서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불 속에 넣어 살라버릴 마음이니, 그 소리는 천촉(喘促)하고 그 얼굴은 푸르러 지금에 그 품속으로 비수를 내어 자처코자 할 듯이 수일은 심중으로 놀라기를 마지아니한다.
『최만경씨의 가슴이 시원히 풀릴 말을 한마디 하여달라 하니 어떻게 말을 하면 되겠소?』
『그 말씀은 당신이 어찌하시는 말씀인지 나는 알 수가 없소. 자기가 헐 말을 남더러 물어보니 남의 속을 누가 안단 말이요.』
『그는 그렇지마는 나도 알 수 없는데요.』
『그게 말씀이요, 무엇이요? 일상 당신은 요리조리 핑계만 하느라고 하시는 말씀이지, 나도 알 수 없다는 말이 되오. 당신에게 향한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여 주시려면 다른 일이야 무엇이 있소. 그만하면 알 일이지요.』
『응, 그러면 알아듣겠소.』
『알아들으셨거든 어서 말씀하여 주오.』
『최만경씨의 하는 말은 좌우간 간절한 심정을 살펴달라 하고, 또는 그 마음을 살피고 잘…… 알아듣도록 말하여 달라고 하는 말이 아니오? 그러하니 그 말이 대단히 어렵구료.』
『아무렇게든지 말씀하여 주시구료. 내 가슴이 시원하도록만 말씀을 하여주시면 좋지요.』
『그러하기에 더 어렵지 않소…… 무엇이라 말해야 당신의 가슴이 시원할는지.』
최만경은 손을 들어 가슴을 가리키며,
『내 이 가슴 속을 자세히 살펴주시면 내가 시원하겠소.』
『당신이 내게 쓴 마음은 정말 고맙소. 나는 당신의 그렇듯 고마운 마음을 평생에 잊어버리지 아니하오리다.』
『수일씨, 정 말씀이지요, 예?…… 여보시오.』
『물론 그렇지요.』
『진정이왼다?』
『글쎄 염려 말아요. 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있소?』
『그러면 그 증거를 보여주셔야지요』
『증거요……?』
『예, 입으로만 하시는 말씀은 내가 믿을 수가 있소? 당신이 그토록 말씀하실 제는 조금치도 마음에 없는 일을 말씀하시겠소마는, 그러한 마음이 계실 것 같으면 그러한 증거가 있을 터이니까 그 증거를 보여줍시사 하는 말씀이올시다.』
『증거를 보여드릴 만하면 왜 아니 보여 드리겠소.』
『그러면 증거를 보여주마 하시는 말씀이요?』
『어떻게 증거를 보인단 말이요?』
『당신이 진정으로 증거를 보여주실 생각만 있으면 그 일이야 여러 가지로 많이 있지요마는…….』
서(西)로 빗긴 달빛은 이슬을 머금어 마당 가운데 가득한데 방안에서 이수일과 최만경 두 사람의 수작은 점점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