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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룬 구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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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룬 구룬(만주어: ᡥᡡᠯ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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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ūlun Gurun)은 하다(Hada), 울라(Ula), 여허(Yehe), 호이파(Hoifa) 네 부족에 대한 총칭이자, 네 부족으로 분열하기 전 해서여진(海西女眞)의 초기 국가를 가리킨다.

역사

[편집]

훌룬 구룬의 시조인 나치불루는 본래 호이파와 울라 지역 사이의 키르사강의 상류 유역에서 성씨없이 홀로 살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이후 쑹화강(송화강, 숭아리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울라 부족의 수장이 되었다.[1]

나치부루 이후 아들 샹기얀도르호치가 수장을 계승했는데, 울라의 마지막 부잔타이의 후손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족보인 『오랍합살호패륵후배당책(烏拉哈薩虎貝勒後輩檔冊)』에 따르면, 그는 1,000여 리에 달하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며 훌룬 구룬을 경영했다고 한다. 도르호치의 사후 아들 기야마카쇼주구가 울라의 수장이 되었다.[2] 기야마카는 1443년 (明)으로부터 올자전위(兀者前衛)의 지휘(指揮)에 임명되었다.[3]

도르호치 쇼주구 사후 아들인 둘기가 훌룬의 수장을 계승했다.[4] 둘기는 성화 연간(1464-1487)에 명나라로부터 올자전위도독(兀者前衛都督)에 임명되었다.[5]

둘기의 사후 훌룬의 명목상 국주는 그의 차남 구더이주얀에게 계승되었지만 명나라에게 탑산전위도독(塔山前衛都督)으로 임명된 것은 기야마카쇼주구의 다른 아들인 수허터였고, 이후에는 기야마카 쇼주구의 4남 수이툰의 아들인 커시너가 도독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커시너 도독과 그 아들 처처무가 또다른 일족 사람인 바다이다르한에게 살해당했다. 결국 처처무의 아들인 왕타이는 시버의 수이하 호톤으로 도주했고, 커시너의 다른 아들 왕주 와일란은 하다로 가서 그곳의 수장이 되었으나 얼마 못 가 살해당하였고 이후 사태를 진압한 왕주 와일란의 아들인 볼콘 셔진시버(Sibe)로 망명해 있던 왕타이를 새로운 수장으로 추대했다.[6] 이후 왕타이요동(遼東)에서 개원(開原) 동부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해서여진인들을 통합했다.[7] 왕타이는 완 한(만주어: ᠸ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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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 han)을 칭했으며 여진과 몽골의 지도자들은 물론 명나라의 요동총병(遼東總兵) 이성량(李成梁)과도 밀접한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맺었다.[7]

한편 커시너를 죽인 바다이 다르한을 제거한 구더이 주얀의 사후 훌룬의 수장은 그의 아들 타이란에게 계승되었고, 그 후 타이란의 아들 부얀으로 이어졌다. 1561년, 부얀은 울라 여러 부락을 무력으로 통합하고, 쑹화강(송화강) 연안에 있는 홍니울라성(烏拉城)을 축조한 뒤 버일러(beile, 貝勒)를 자칭했다.[8][9] 부얀의 사후 아들 부간이 수장을 계승했다. 이 무렵 부얀의 종형제 하다의 완 한 왕타이의 세력이 강성하여, 여진의 각 부의 패주가 되었으며, 울라도 하다에 종속되었다. 울라는 하다에 협력하여 공동의 이익을 취함으로써 왕타이의 패권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명나라와도 하다를 거쳐 교류하였다.[10] 하다의 왕타이가 죽은 뒤 후계자인 후르간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병사하여 후계자 분쟁이 벌어져 하다가 혼란에 빠지자, 울라는 여세를 몰아 하다의 통제에서 벗어나 여허와 함께 수완과 시버 2부를 분할하고, 원래 울라의 지배를 받았던 수이하성을 탈환했다.[11] 부간의 사후 아들 만타이가 후계자가 되었다.[12] 만타이 부자는 변경에 있는 마을인 수와얀 시란이란 곳으로 가서 그곳을 수선하고 해자를 파도록 했는데, 이때 부자가 마을 부녀자 두 명을 탐하여 결국 밤에 그들의 남편에게 살해당했다.[13]

만타이 사후, 울라 수장은 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에게 4년간 억류되었던 만타이의 아우 부잔타이가 계승하였다. 그는 누르하치가 보낸 툴쿤 후왕잔볼콘 피양구 휘하 병력의 보호를 받으면서 숙부 힝니야의 암살 시도를 피하여 한으로 즉위하게 된다.[13] 그는 여허와 몽골 부락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14] 1597년에 여허와의 혼인동맹을 이용하여 동해여진(東海女眞)의 와르카의 안추라쿠 일대의 로툰을 비롯한 세 부족의 신속을 받아냈으며,[15] 1603년~1605년 무렵에는 조선 함경도 종성의 동관과 온성의 유원을 공격하여 조선군과 충돌하고,[16][17][18] 건퇴에 병력을 유둔시켜 인근 조선의 번호였던 동해여진 부족들을 신속시켰다.[19][20] 마침내 부잔타이는 1605년 조선 조정으로부터 당상(堂上)의 직첩을 받아낼 수 있었다.[21]

16세기 후반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누르하치는 점차 패권적 팽창을 시작했다. 때로는 누르하치가 임명한 추장이 반기를 들고 독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울라의 부잔타이가 그러한 예이다. 결국 훌룬 부족들은 모두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에 흡수되었다. 복속된 시기는 하다가 1599년, 호이파가 1607년, 울라가 1613년, 여허가 1619년이었다.[22][23]

각주

[편집]
  1. 홍 저오; 오르타이; 쉬유완멍; 푸민 (1744). 《팔기씨족통보23. erei da mafa nacibulu. hoifai cala. ulai ebele. kirsa birai sekiyen de emhun tehebi...monggoso tafara be nakafi. si ai hala seme fonjiha de. anggai ici nara seme jabuha. tereci nara hala obume hūlame deribuhe...ulai ba i niyalma. bira de gurgu gasha i funiyehe. funggaha eyere be sabufi. orin niyalma tucibufi tuwanabume unggihe. nacibulu ini abalafi baha gurgu gasha yali sukū dethe funggaha be. etere be tuwame bufi unggihe. tere orin niyalma bederefi geren de alaha manggi. geren acafi hebešefi okdome gamafi. aiman i da obuha. 
  2. 홍 저오; 오르타이; 쉬유완멍; 푸민 (1744). 《팔기씨족통보23. (nacibulu i) jui šanggiyan dorhoci sirame ulai aiman i da oho. šanggiyan dorhoci akū oho manggi. jui giyamaka šojuku siraha. 
  3. 『영종예황제실록(英宗睿皇帝實錄)』 卷100 정통(正統) 8년 정월 27일 계미일(癸未日), "癸未, 命故兀者前衛指揮同知哈必荅(哈必荅:抱本에는 荅은 合으로 되어 있음)子加木哈, 阿剌山衛指揮僉事忽魯忽納(忽魯忽納:抱本에는 忽魯納로 되어 있음)子沙魯, 斡蘭河衛指揮僉事亦薛哥子卜兒哈, 忽里吉山衛指揮僉事只魯哈(只魯哈:廣本에는 只가 吉로 되어 있음)子兀劄哈, 木蘭河衛指揮僉事不哈孫加哈你, 俱襲職. 禾屯吉衛指揮僉事粉甫老疾, 以其子哈魯代之."
  4. 『만주실록(滿洲實錄)』, "giyamaka šojugū de banjihangge suitun suitun de banjihangge dulgi"
  5. 『헌종순황제실록(憲宗純皇帝實錄)』 卷259 성화(成化) 20년 12월 27일, "陞兀者前衛都指揮同知都里吉, 爲都督僉事. 故事, 夷官授職二十五年, 始進一級. 頃, 都里吉以都指揮僉事求陞都督. 兵部已議, 陞都指揮同知. 至是, 復申前請, 且鄰壤皆爲奏保, 而遼東守臣亦言, 其部落甚多, 衆心信服. 遂陞之."
  6. 『만주실록(滿洲實錄)』, "哈達國 : 哈達國汗, 姓納喇, 名萬, 本呼倫族也. 後因住哈達處故名哈達, 乃烏拉部徹徹木之子納齊卜祿第七代孫也. 其祖克錫納都督被族人巴岱達爾漢所殺, 萬遂逃住錫伯部綏哈城, 其叔旺住外蘭逃至哈達部為部長. 後哈達部叛旺住外蘭被殺, 其子博爾坤殺父仇人, 請兄萬為部長, 萬於是遠者招徠, 近者攻取, 其勢愈盛, 遂自稱哈達汗.", "hadai gurun i wan han i hala nara gurun i da gebu hūlun amala hada gebungge ba de gurun tehe seme gurun i gebu be hada sehe ulai gurun i beisei da mafa nacibului nadaci jalan i omolo wan i mafa kesine dudu be ini uksun i badai darhan wara jakade wan burulame tucifi sibei aiman i hanci suiha gebungge hoton de tehe wan i eshen wangju wailan geli burulame genefi hadai aiman de ejen oho amala hadai aiman facuhvrafi wangju wailan be waha manggi wangju wailan i jui bolkon šejin amai bata be wafi ahvn wan be suiha hoton de ganafi uthai aiman de ejen obuha wan hanciki be dailame goroki be dahabume etenggi oho manggi wan enculeme han ofi"
  7. Crossley, Pamela Kyle (2002), 《A Transluce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39–40쪽, ISBN 0-520-23424-3 
  8. 『만주실록(滿洲實錄)』, "古對珠延生太蘭, 太蘭生布顏盡收烏拉諸部率眾於烏拉河洪尼處築城稱王. 布顏卒, 其子布干繼之. 布干卒, 其子滿泰繼之.", "gudei juyan de banjihangge tairan tairan de banjihangge buyan buyan ulai aiman be gemu dahabufi ulai birai dalin i hvngni gebungge bade hoton arafi tefi enculeme beile sehe buyan de banjihangge bugan bokdo buyan beile akū oho manggi jui bugan siraha bugan beile akū oho manggi jui mantai siraha"
  9. 홍 저오; 오르타이; 쉬유완멍; 푸민 (1744). 《팔기씨족통보23. tairan akū oho manggi. jui buyan siraha. buyan ulai aiman be gemu dahabufi. ulai birai hūngni dalin i gebungge bade. hoton arafi tefi. enculeme beile sehe. 
  10. 赵东升; 宋占荣(1992). 《乌拉国简史》. 中共永吉县委史办公室. p.16
  11. 赵东升; 宋占荣(1992). 《乌拉国简史》. 中共永吉县委史办公室. pp. 20, 90
  12. 홍 저오; 오르타이; 쉬유완멍; 푸민 (1744). 《팔기씨족통보23. bugan akū oho manggi. jui mantai siraha. 
  13. 《太祖武皇帝實錄》 1. 1636. 先,陣前所擒布占太,恩養四載,至是七月,太祖欲放歸, 令禿兒空黃占、撥兒孔非英佔二人護送。 未至其國時,布占太兄滿太父子二人往所屬拴煙濕攔處修邊鑿壕, 父子淫其村內二婦,其夫夜入,將滿太父子殺之。 及布占太至日,滿太叔父興泥牙貝勒謀殺布占太,欲奪其位。 其護送二大臣保守門戶甚嚴,不能加害,於是興泥牙投夜黑而去。 布占太遂繼兄位為兀喇國主。 護送二人辭回。 十二月,布占太感太祖二次再生,恩猶父子,將妹滹奈送太祖弟黍兒哈奇貝勒為妻,即日設宴成配。 
  14. 阎崇年 (2006). 《努尔哈赤传·正说清朝第一帝》. 北京出版社. 59쪽. ISBN 9787200016598. 
  15. 《太祖武皇帝實錄》 1. 1636. 其布占太亦因與夜黑通, 將滿太妻都都庫氏所玩銅錘, 遣使送與納林卜祿. 又將滿洲所屬斡兒哈部內按褚拉庫•內河二處酉長落吞•剛石吞•旺吉諾三人許獻夜黑, 請其使而招服之. 
  16. 선조실록(宣祖實錄)』 166권, 만력 31년(1603) 9월 2일 을묘 1번째 기사, "○乙卯/備邊司啓曰: "伏見北兵使及巡察使狀啓, 則賊胡雖小退, 而留屯豐界, 至造木柵, 爲久駐之計. 又犯於潼關, 接我而退, 其勢似爲鴟張. 前頭邊患之寢息, 恐未易爲期."
  17. 선조실록(宣祖實錄)』 166권, 만력 31년 9월 3일 병진 2번째 기사, "○咸鏡北道兵使李用淳馳啓曰: "忽賊之圍潼關也, 接戰將士等, 皆曰: ‘前與忽溫相戰已熟, 今見此賊, 則長甲、大劍, 鐵騎奔馳, 旗麾進退之狀, 大非忽溫."
  18. 선조실록(宣祖實錄)』 169권, 만력 31년 12월 22일 계묘 4번째 기사, ○備邊司啓曰: "忽溫之賊, 累次衝突, 去秋來犯鍾城, 今者又犯柔遠, 移屯於穩城江邊, 搜索藩胡, 其勢鴟張, 誠非細慮, 而兵使方在行營, 距穩城僅一日程之地。 必能臨機策應, 似無可虞, 但此賊胡, 雖不直犯鎭堡, 每次搶掠藩胡, 使我藩籬, 盡撤無餘, 其志似不在小。 若使邊將, 抄發精銳, 或乘夜斫營, 或設伏歸路, 相機要擊, 少挫其勢, 則必不至於如是凌轢。 令兵使, 十分設策, 使我兵威稍挀, 賊勢稍戢。 且自會寧, 歷鍾城、穩城, 已爲侵犯, 其勢必將及於慶源、慶興。 防備瞭望等事, 更加申飭, 俾無疏虞, 賊兵去留探問, 連續馳啓事, 監司處, 發馬行移何如?" 傳曰: "依允。"
  19. 선조실록(宣祖實錄)』 186권, 만력 33년 4월 16일 경신 11번째 기사, "啓曰: "所謂伊項、牛虛部落, 爲賊爪牙, 我國動靜, 無不通於忽酋, 潼關之變, 此賊爲之向導云。 金宗得徵聚六鎭及三邑之軍, 先爲掩殺, 此必剪去羽翼, 以爲漸圖件退之計矣。 但自我境, 抵件退, 四息餘程, 其間部落, 叛附於忽賊者, 亦有四、五處, 必盡爲除去, 然後行師, 動兵深入, 似非其宜。 都巡察使徐渻想已進到, 相與十分商確, 務在愼重, 毋貽後悔之意, 急遣宣傳官, 馳諭于監、兵使處, 何如?" 傳曰: "允。"
  20. 선조실록(宣祖實錄)』 186권, 만력 33년 4월 25일 기사 4번째 기사, "巡察使徐渻馳啓: "金宗得牒呈: '柔遠鎭境深處胡人, 自忽溫出來言: 「件退, 曾留騎軍三百餘名, 又騎軍一百五十餘名, 今已到件退。」 云.' 當此農民布野之時, 聲息如此, 衝東擊西之患, 極爲可慮. 會寧、穩城諸胡, 皆懷貳心, 稍稍撤去, 水上、下三百餘里, 當盡爲添防, 兵分勢弱, 糧亦垂渴, 將來之憂, 極爲危急."
  21. 선조실록(宣祖實錄)』 190권, 만력 33년 8월 29일 신미 3번째 기사, "以備忘記傳于右承旨柳夢寅曰: "忽賊職牒, 予之初意, 雖可盡許, 不欲一時許之. 然僉意如彼, 百牒竝許, 亦或可矣。 至於阿叱耳之職, 則已授堂上, 使人纔還, 豆滿之波, 未乾於馬足, 而無端旋陞嘉善, 將卒之竝爲堂上, 職秩無等, 雖似未穩, 然此等之節, 則在我不須致慮, 必待彼更請然後, 不得已勉許可也."
  22. Crossley, Pamela Kyle (2002), 《The Manchus》, Peoples of Asia 14 3판, Wiley-Blackwell, 62, 64쪽, ISBN 0-631-23591-4 
  23. Fairbank, John K.; Twitchett, Denis Crispin (2002), 〈Part 1〉,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9, Cambridge University Press, 30쪽, ISBN 0-521-243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