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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태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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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피 사용자의 주요 참고사항 삭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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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스스로가 고려말 공민왕 시절 요동수복을 위한 북벌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이후에는 수도를 후방인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의 공식적인 마지막 요동 수복 운동(우왕 시절) 때에 군대를 이끌고 가다가 도중에 위화도에서 회군하기도 했다.

해당 내용은 모두 본문에 제시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특정 인물의 행적 중에서 특정 의견에 부합 혹은 편중되는 일부분만 뽑아서 모아 놓음으로써 특정한 의도를 만들어 내는 것은 명백한 주관적 편집이며, 비중립적인 편집이기도 합니다. 해당 편집은 명백하게 그렇게 볼 수 밖에 없으며, 이는 삭제 대상입니다. 해당 내용을 본문에 첨가하길 원하신다면, 해당 특정 의견을 제시한 공인된 출처를 제시하시고, 그 내용은 평가와 같은 제목으로 따로 서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0년 12월 9일 (목) 14:13 (KST)답변

태조왕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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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의 가계도는 어떻게 공부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책을 보니까 왕후 2명은 나와 있고, 후궁은 ?로, 의령옹주숙신옹주가 ?의 소생으로 되어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건가요? --Pep (토론) 2011년 9월 24일 (토) 3:32 (KST) 14.37.73.244 (토론) 2011년 9월 24일 (토) 15:33 (KST)답변

사료 인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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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 대하여 여말선초 사료들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조실록, 정종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모두 조선 개국 이후 편찬했으므로 하나도 믿을 수 없고, 야사 중심으로 기술하겠다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록은 엄연히 신뢰할 수 있는 출처로 인정되는 정사이며,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유산입니다. 태조실록이 조선 왕조 역대 실록 중 가장 공정성이 부족하다고 하셨는데, 단종실록이나 선조실록 상태를 먼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실록을 인용한 서술은 정확한 출처를 표기한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사료 인용에 대하여에 대한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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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고려사절요,태조실록,정종실록,태종실록,세종실록들이 조선 개국 이후에 편찬되었으니 하나도 믿을 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저는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야사만 믿겠다는 식으로 답변을 단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태조실록~세종실록은 여말선초의 주요 자료중 하나이지요. 그리고 태조실록이 가장 공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역대 조선왕조실록들중 유일하게 임금이 내용을 전부 보고 고친 대본을 바탕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말이죠. 물론 단종실록이나 선조실록도 정확성,공정성,상세성 등에서 엉망이지만 임금이 직접 내용을 다 보고 고친 자료들은 아닙니다. 왕조 시대 사료의 가장 기본 원칙인 임금이 그 내용을 보면 안 된다는 원칙을 전면적으로 거슬렀기 때문에 조선왕조태조실록은 역대 조선왕조실록중 가장 공정성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말 상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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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국가 운영이 한계에 도달했으며 권문세족의 부패, 권신들과 영합한 우왕의 난행과 폭정, 중국 원명교체기 홍건적과 일본 남북조 내전 왜구의 침입, 사전 겸병과 생산수단인 토지 문제, 파행적 정치와 외교 등으로 인해 한국 역사에서 다시 찾기 어려운 난세였다는 사실은 공인 되어 있습니다. 설령 여말선초 사서에 조작과 과장이 있다고 해도, 이러한 사실들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참고와 주의 부탁드립니다.

이 문서 내용의 출처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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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 많이 인용된 <한국사 100장면>은 1998년 출판된 역사 분야 교양 대중서로, 출간 이후 20년이 지났습니다. 당대 정사와 국편위 한국사를 비롯한 여러 전문 연구서를 기준으로 최신 학설을 업데이트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Spring lee lee (토론) 2020년 6월 7일 (일) 19:54 (KST)답변

지속적인 개인 연구에 관련한 어드바이스 : 야사가 야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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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에서 모든 사료는 반드시 비판적 검증을 필요로 합니다. 학계에 보고하는 전문 연구에서 야사를 레퍼런스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사료와 교차하여 검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사 중 최고봉이라는 <연려실기술>조차 대중 역사서에만 인용될 뿐, 전문 연구 논문에서는 결코 인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두문동 72현, 부조현 설화, 성계탕, 성계육, 조랭이떡, 왕씨 몰살, 함흥차사 등 여말선초의 수많은 야사들은 사료 비판이 가능한 범주 바깥에서 후대의 여말선초 인식을 보여줄 뿐, 당대 역사상 이해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김종서가 충신으로 복권된 계기는 야사 덕분이 아니고, 본인의 떳떳한 행듕 그리고 후대에 제기된 충신론과 현대의 학계 연구 덕분입니다. 야사 관련한 내용은 각주로, "~한 야사도 있으나 당대의 사실은 아니"라고 명시하여 보다 명쾌한 문서 작성을 도와주십시오. Spring lee lee (토론) 2021년 6월 18일 (금) 11:46 (KST)답변

야사가 야사일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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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 야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근거는 무엇인지요? 참으로 어이없는 말씀을 하시네요. 그리고 왕씨 몰살과 두문동 이야기와 부조현 이야기는 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조선왕조태조,영조,정조,순조,고종 실록에도 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왕씨 몰살의 기사들은 분명히 조선왕조태조실록에 여러차례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걸 왜 억지로 부인하시는 것입니까? 님이 말씀하시는 학자들이란 태조 이성계를 맹목적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연구자님들이 아닌지요? 조선왕조태조실록에 분명히 몰살에 가까운 대량학살이 있었다고 여러 차례 언급이 되었는데 님이 말씀하시는 학자님들은 왜 이것을 부인하신다는 것입니까? 참으로 이해를 할 수가 없네요. 그리고 김종서가 충신으로 복권된 계기가 무슨 현대의 학계 연구 덕분이라는 말입니까? 김종서는 조선 영조때 공식적으로 충신으로 복권이 되었는데 여기서 현대 학계의 연구가 들어갈 여지가 어디 있는지요?


지속적인 개인 연구에 관련한 어드바이스 : "소수 학설"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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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이 변안렬과 태조의 공동 전공이라는 견해에 변안렬 평전 저자들 외에 다른 고려사 연구자들이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까? 태조 대 화약 무기에 관련하여 "이기적"이라는 자극적 코멘트를 정말 해당 연구자가 사용하였습니까? 혹은 화약 무기 사용 절제가 정권 보위 목적이라는 2인 이상 연구자의 견해가 있습니까? 아무리 소수 학설이라고 해도 당당하게 외부 지식 문서에 소개하려면 최소한 2인 이상 연구자의 지지를 받는 학설이어야 할 것입니다. "일각의 학설"을 근거로 태조와 조선 왕조를 폄하하는 사견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Spring lee lee (토론) 2021년 6월 18일 (금) 11:51 (KST)답변


지속적인 개인 연구에 관련한 어드바이스 : "소수 학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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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변안열 평전에서 우리나라의 가장 권위있는 역사학자들이 인정하신 내용입니다. 님은 조선연구사의 최고 권위자중 한 분이시고 우리나라 정부에서 우리나라 역사를 편찬하는 공식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성무 교수님이 소수 연구자로 보이십니까? 그리고 이재범 교수님도 후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전기에 관한한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학자분중 한 분이십니다. 님은 이성무 교수님과 이재범 교수님이 소수 연구자로 보이십니까? 참으로 기가 막히네요. 님의 입맛에 맞는 연구자들만 정론을 제기하는 것이고 님의 입맛에 맞지 않는 연구자들은 무조건 소수 학설을 제기하는 2류 연구자로 보이십니까? 그리고 황산대첩이 변안열과 태조의 공동 전공이고 고려 말 조준의 건의로 화통 도감이 폐지되었는데 이것은 정권의 보위 목적이라는 것은 이성무 교수님 이하 변안열 평전 제작에 참여한 교수님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님께서는 이성무,이재범,정구복,박종기,고혜령,허흥식 같은 우리나라의 권위있는 역사학자님들의 의견이 소수 학설로 보이십니까? 이런 권위 있는 역사학자들을 마치 2류 연구자로 보는 님의 태도가 더 기가 막힙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학자들의 의견만 정통 학설로 보시는 잘못된 편견을 버리십시오.

지속적인 개인 연구에 관련한 어드바이스 : 두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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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 설화는 최소한 5개의 조선시대 개성 지위에 관련한 연구에서 18세기 이후 만들어진 야사 또는 "조선 왕조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고려 충신 상"을 위해 변형된 설화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두문동 설화가 진실이라고 서술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조선 초에 두문동이 존재"했다는 2개 이상의 연구를 출처로 제시하십시오. 학계에 보고된 통설이 두문동을 설화로 간주하고 있음에도 태조와 조선 왕조에 대한 사감에서 비롯된 사견으로 두문동이 실존했던 것처럼 서술하고, 실제 고려에 충의를 지킨 인물과 두문동을 혼용하는 기조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Spring lee lee (토론) 2021년 6월 18일 (금) 11:58 (KST)답변

지속적인 개인 연구에 관련한 어드바이스 : 두문동 에 대한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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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야기를 드렸지만 두문동 이야기는 조선왕조영조,정조,순조,고종실록에서 엄연히 기록된 것입니다. 이성계를 무조건 옹호하고 싶은 학자들의 논문들만 가지고 두문동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님께서는 그렇게 정사를 옹호하시면서 왜 조선왕조실록에 여러차례 공식적으로 기록된 두문동의 이야기는 다 부정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나라 정부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모든 것들을 백과사전으로 만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문동 편에서도 두문동의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허구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 학계에서 대부분 인정하는 정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님은 정사와 학자님들의 의견은 그렇게 중요시를 하시면서 왜 이 부분은 애써 외면하시는지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두문동 편의 서술을 예전대로 유지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사견에 관하여 : 태조 대 서경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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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대 서경 제도가 정 4품 이상 고위 관료를 서경을 국왕의 관교로 제한하여 고려에 비해 인사제도가 퇴보했다는 사견을 서술하였으나, 남지대(1996, <조선 건국초 인사관리제도의 성립>, 서원대학교 미래창조연구원, 인문과학연구 5)의 연구에 따르면 정 4품 이상 고위 관료의 인사권이 국왕에게 귀속된 것은 태조 대의 정치 개혁으로 4품 이상 고위 재상에 대한 국왕의 인사권을 강화하는 것이었고 이는 도병마사에서 귀족 연립 정치를 시행했던 고려에 비하여 발전적 정치 체제였으며 국왕의 측근과 권신이 정치 권력을 독점한 고려 말 폐습을 제거한 것입니다. Spring lee lee (토론) 2021년 6월 18일 (금) 12:09 (KST)답변

지속적인 사견에 관하여 : 태조 대 서경 제도에 대한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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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여전히 님의 입맛에 맞는 연구자님들의 견해만 인용하시는군요. 서경 제도가 고려 때의 제도에 비해 후퇴한 것이 어떻게 고려 말 폐습을 제거한 선진적인 제도라고 하십니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서경 제도가 후퇴해서 이에 대간에서 이를 공박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무슨 서경 제도 후퇴가 선진적인 제도라고 하시는지요? 인사청문회를 후퇴시킨 것이 어떻게 정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인사청문회의 발전은 국왕의 측근과 권신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견제하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과거 독재정부 시절에 비해 인사청문회를 현저히 발전시킨 것과 경우가 같은 것입니다.


지속적인 개인 연구에 관한 어드바이스 : 왕씨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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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년 왕씨 제거는 "왕씨 학살", "왕씨 학살" 등으로 널리 알려져 왕씨들을 모두 제거했다는 식의 야사로 호도되었으나, 2015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유진 박 교수의 동아시아학술원 발표와 저서 <조선시대 개성 왕씨의 정치적 위상과 사회적 지위>의 연구에 따르면 계승권을 가진 130명에서 150명 사이의 남성을 제거하였고, 그 외에는 변성명을 통해 살려준 이후 생활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개경에 목청전과 유후사를 설치하여 전조 수도로서 위상을 확보했습니다. 이를 반박하고 싶다면 2인 이상 연구자가 지지하는 학설을 제시하기 바랍니다. Spring lee lee (토론) 2021년 6월 18일 (금) 20:25 (KST)답변

지속적인 개인 연구에 관한 어드바이스 : 왕씨 제거에 대한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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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명~150명 사이의 남성들을 죽인 것이 대량 학살이 아니라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리고 변성명을 통해 나머지는 살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 어디에 있습니까? 태조실록에 분명히 중앙과 지방의 왕씨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했다고 기사들이 나오는데 무슨 변성명을 통해 살려주었다고 하십니까? 오히려 제가 님에게 묻고 싶습니다. 태조와 그 측근들이 변성명 제도를 만들어서 나머지 왕씨들을 살려주었다는 이야기의 정확한 사료 출처를 대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지속적인 개인 연구에 관한 어드바이스 :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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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를 정당힌 지식 체계에 따른 정사와 학계 연구 성과대로 수정하면, 지속적인 야사 차용과 개인적 연구, 사감을 담아 롤백하는 이용자가 있습니다. 학계에 보고된 연구로 부정된 야사를 실제 역사인 것처럼 서술하는 행동은 정식 지식 체계를 따르는 위키백과의 품위와 신뢰성을 위해 지양해야 할 행동입니다. 한 번 더 이와 같은 행동이 있을 경우 문서 관리자에게 정사와 학계 연구가 아닌 야사가 개인 연구 게시 중지를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야사 차용 금지"는 "편견"이 아닌 학계의 정식 연구 체계이고, 위키백과의 신뢰성을 높여줄 정도(正道)입니다. Spring lee lee (토론) 2021년 6월 18일 (금) 20:29 (KST)답변

지속적인 개인 연구에 관한 어드바이스 : 우려 에 대한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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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는 님의 입맛에 맞는 연구자들의 연구만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연구자들의 연구는 애써 외면하시는데, 그것이야말로 사감이 아닙니까?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부정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입맛에 안 맞는 연구는 모두 부정 되었다고 강변하시는 것이 참으로 어이가 없네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학계에서 야사를 전부 부정한다는 근거를 대십시오. 현실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육신의 명단이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응부,유성원 이라는 이야기에 어떤 분이 이의를 제기해 유응부 대신 김문기를 넣어야 한다고 해서 학계에서 오랜 시간 토론을 해서 기존의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학설을 유지하기로 한 것의 주요 근거가 남효온이 쓴 야사인 '육신전'이었고, '조일전쟁'의 사료로서 조선왕조선조실록 이상의 가치를 학계에서 인정하는 '징비록'도 유성룡의 한 개인이 쓴 야사입니다. 학계에서는 야사를 전혀 인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잘못된 말씀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지속적인 개인 연구에 관한 어드바이스 : 이원계와 이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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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는 지식 체계로서 학계와 동일한 검증을 따라야 합니다. 대흥 이씨 족보는 사료가 아닙니다. 학계에서는 족보의 "형식"으로부터 가계 구조와 사회 구성을 추론할 뿐 그 "내용"을 정식 사료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후대에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족보가 어떻게 사료가 될 수 있겠습니까? Spring lee lee (토론) 2021년 6월 18일 (금) 20:49 (KST)답변

지속적인 개인 연구에 관한 어드바이스 : 이원계와 이연계 에 대한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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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흥 이씨를 본관으로 하는 사람들이 엄연히 있는데 대흥 이씨 자체가 없었다는 억지를 어떻게 주장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