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춘추)
신생(申生, 생년 미상 ~ 기원전 655년)은 진 헌공의 맏아들이며, 진 혜공과 진 문공의 맏형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살하려고 하자 그는 자결한다. 사후 공태자란 시호를 받았다.
출생
[편집]춘추시기의 역사서 《춘추좌씨전》의 '장공 28년'과 《사기》 권39(卷三十九) 진세가 제9(晉世家 第九)에 따르면, 신생은 진나라 헌공(獻公)의 첫째 아들이다. 헌공은 아버지 무공의 첩인 제강(齊姜)과의 사이에서 장차 진나라 목공(穆公)의 부인이 될 딸과 태자 신생을 낳았다.[1]
죽음
[편집]신생의 죽음에 관한 일화가 《춘추좌씨전》 '희공 4년'에서 등장한다. 헌공이 여융(驪戎)을 정벌했을 때, 여융의 왕은 여희(驪姬)를 그에게 바쳤다. 헌공은 여희를 데리고 돌아와 해제(奚齊)를 낳았고, 그녀의 여동생에게서 탁자(卓子)를 낳았다.[2] 여희는 자신의 아들 해제를 태자로 세우려고 모의를 꾸몄다. 그녀는 태자 신생에게 말하기를 '임금님께서 꿈에 당신의 어머니 제강을 보았으니 속히 제사를 올리라.'고 하여, 태자는 곡옥 지방에서 어머니의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에 사용한 술과 고기를 아버지 헌공에게 보냈지만, 그는 사냥을 나간 상태였다. 여희가 그것들을 6일 동안 궁중에 두었다가 헌공이 도착하자 독을 넣어 헌공에게 바쳤다. 헌공이 그 술을 마시기 전에 땅위에 고수레하니 땅이 부풀어 오르고, 개에게 주니 개가 죽고, 하인에게 주니 또한 하인도 죽었다. 여희가 이를 보고 헌공에게 '태자가 도적이다.'라고 울며 말하였다. 신생은 신성(新城)으로 달아났고, 이에 헌공은 신생의 스승 두원관(杜原款)을 죽였다. 결국 신생은 여희에 눈먼 아버지가 자신의 변명을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고, 12월 무신일에 곡옥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3]
아우 진 혜공이 즉위한 후 신생에게 '공'(共, 恭)이란 시호를 올려 공태자라 하고, 개장하였다.[4][5]
춘추시기의 역사서 국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신생이 직상(稷桑)에 이르자 적인(狄人)이 나와 저항했다. 신생이 나가 싸우려 하자, 호돌(狐突, 진 문공의 외조부인 백행(伯行))이 신변 위험과 참언(신생을 태자에서 밀어내려는 참언)을 이유로 말렸다. 그러나 신생은 직상에서 적인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이후에 참언이 더욱 일어났고, 호돌은 문을 닫고 문 밖 출입을 삼갔다. 군자가 이에 대하여 말하였다. ‘호돌은 사려가 깊도다.’-- 《국어》 제7권 중[6]
이 부분이 고사성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참고 문헌
[편집]각주
[편집]- ↑ 晉獻公娶于賈,無子。烝于齊姜,生秦穆夫人及大子申生。 중국어 위키문헌 《春秋左氏傳》莊公
- ↑ 晉伐驪戎,驪戎男女以驪姬。歸生奚齊。其 娣生卓子。 중국어 위키문헌 《春秋左氏傳》莊公
- ↑ 既與中大夫成謀.姬謂大子曰.君夢齊姜.必速祭之.大子祭于曲沃.歸胙于公.公田.姬寘諸宮.六日.公至.毒而獻之.公祭之地.地墳.與犬.犬斃.與小臣.小臣亦斃.姬泣曰.賊由大子.大子奔新城.公殺其傅杜原款.或謂大子.子辭.君必辯焉.大子曰.君非姬氏.居不安.食不飽.我辭.姬必有罪.君老矣.吾又不樂.曰.子其行乎.大子曰.君實不察其罪.被此名也以出.人誰納我.중국어 위키문헌 《春秋左氏傳》僖公
- ↑ 정태현 : 《역주 춘추좌씨전 2》, 전통문화연구회, 2006년, ISBN 89-85395-89-0 94140, 81쪽
- ↑ 晉君改葬恭太子申生. 중국어 위키문헌 《史記》 卷039
- ↑ 至于稷桑,狄人出逆,申生欲戰。狐突諫曰:「不可。突聞之:國君好艾,大夫殆;好內,適子殆,社稷危。若惠于父而遠于死,惠于眾而利社稷,其��以圖之乎?況其危身于狄以起讒于內也?」申生曰:「不可。君之使我,非歡也,抑欲測吾心也。是故賜我奇服,而告我權。又有甘言焉。言之大甘,其中必苦。譖在中矣,君故生心。雖蝎譖,焉避之?不若戰也。不戰而反,我罪滋厚;我戰死,猶有令名焉。」果敗狄于稷桑而反。讒言益起,狐突杜門不出。君子曰:「善深謀也。」 중국어 위키문헌 《國語》券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