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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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윤 金富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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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김용성 |
로마자 표기 | Kim Bu-yun |
출생 | 미상 미상 |
사망 | 1303년 7월 24일 미상 |
국적 | 고려 |
학력 | 미상 |
경력 | 미상 |
직업 | 무신 |
활동 기간 | 미상 |
소속 | 미상 |
종교 | 미상 |
배우자 | 미상 |
병역 | 미상 |
상훈 | 미상 |
김부윤(金富允: 미상~1303년 7월 24일(음력 6월 10일)[1])은 고려의 무신이다. 본관은 토산, 처음 이름은 김용성(金用成)이다. 김취기의 아버지다.[2]
약력
[편집]- 생년: 미상. 군인에서 출세함.[3]
- 좌도지시위군(左都知侍衛軍)에 속했다가 교위(校尉)로 보임받음.[2]
- 1269년(원종 10): 충렬왕이 세자일 적에 세자의 곁에서 호종함. 이에 감명한 쿠빌라이 칸이 그에게 무덕장군 정동행중서성이문소관(武德將軍 征東行中書省理問所官)으로 제수함.[2]
- 1273년(원종 14): 원나라에서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한 사실을 알려오자 원나라에 가서 책봉을 하례함. 이때 낭장(郎將: 정6품)으로서 통역 업무의 총책임자[譯語行首]였음.[4]
- 1276년(충렬왕 2): 중금지유로서 원으로 가 황칠을 바치고 다음 해(1277년)에 입조(入朝)할 때 필요한 역마와 사료를 요청함.[5]
- 1279년(충렬왕 5): 장순룡과 함께 원에 감.[6]
- 1280년(충렬왕 6): 경상도와 전라도에 기근이 들어 장군(將軍: 정4품)으로서 원으로 가서 쌀을 빌리도록 함.[7]
- 1282년(충렬왕 8): 왕이 세자였을 적에 호종한 공을 인정받아 이등공신으로 봉해짐.[8]
- 1283년(충렬왕 9): 호군으로서 원에서 돌아옴. 원에서 각 도에 권농사(勸農使)를 보냄.[9]
- 1298년(충선왕 즉위): 자정원부사 판사진시사(資政院副使 判司津寺事)로 임명받음과 동시에 상호군(上護軍: 정3품)을 겸함.[10]
- 1298년(충렬왕 24): 밀직부사(密直副使: 정3품)로 임명받음.[11]
- 1299년(충렬왕 25): 서북면도지휘사로 임명받음.[12]
- 1300년(충렬왕 26): 지밀직사사 전리판서(知密直司事 典理判書)로 임명받음.[13]
- 1302년(충렬왕 28):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종2품)로 임명받음.[2]
- 1303년(충렬왕 29): 7월 24일(음력 6월 10일),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정2품)로 죽음.[1]
전기 자료
[편집]- 《고려사》 권107, 〈열전〉20, 김부윤
관련 논문
[편집]- 권용철, 〈원 제국의 다르칸 제도가 고려에 유입된 양상 - 고려 후기 金汝盂 功臣敎書의 분석을 중심으로〉, 《학림》 47, 연세사학연구회, 2021년 3월, 184~85면에서 그를 언급함.
각주
[편집]- ↑ 가 나 《고려사》 권32, 〈세가〉32, 충렬왕 29년(1303년) 6월 10일(병신)
- ↑ 가 나 다 라 《고려사》 권107, 〈열전〉20, 김부윤
- ↑ 《고려사절요》 권22, 충렬왕 29년(1303년) 6월
- ↑ 이승휴, 《동안거사집》 권4, 빈왕록 서문
- ↑ 《고려사》 권28, 〈세가〉28, 충렬왕 2년(1276년) 11월 23일(계축)
- ↑ 《고려사절요》 권20, 충렬왕 5년(1279년) 9월
- ↑ 《고려사절요》 권20, 충렬왕 6년(1280년) 4월
- ↑ 《고려사》 권29, 〈세가〉29, 충렬왕 8년(1282년) 5월 2일(경신)
- ↑ 《고려사》 권29, 〈세가〉29, 충렬왕 9년(1283년) 10월 3일(계미)
- ↑ 《고려사》 권33, 〈세가〉33, 충선왕 즉위년(1298년) 7월 14일(무술)
- ↑ 《고려사》 권31, 〈세가〉31, 충렬왕 24년(1298년) 11월 27일(경술)
- ↑ 《고려사》 권31, 〈세가〉31, 충렬왕 25년(1299년) 3월 4일(을유)
- ↑ 《고려사》 권31, 〈세가〉31, 충렬왕 26년(1300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