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하백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2년 7월) |
허하백
| |
---|---|
24살 시절 | |
조선총독부 대화숙평의회 대표상무평의원 | |
임기 | 1941년 12월 21일~1942년 4월 25일 |
군주 | 히로히토 |
섭정 | 도조 히데키 |
총독 | 미나미 지로 |
총리 | 도조 히데키 |
조선인민공화국 총리 여성행정교육특보비서관 | |
임기 | 1945년 9월 6일~1945년 12월 27일 |
부주석 | 여운형 |
총리 | 허헌 |
부총리 | 최근우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09년 |
출생지 | 대한제국 함경북도 청진 |
사망일 | ? |
경력 | 조선공산당 교육행정특보위원 전국부녀총동맹 제2부총재 |
정당 | 무소속 |
배우자 | 김복진 |
친인척 | 김팔봉(시제) 김복희(시질녀) |
허하백(許河伯, 일본식 이름: 金村河伯 가네무라 가와하쿠, 1909년~?)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교육인 겸 여성계 인물로 조각가 김복진의 부인이다.
생애
[편집]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하였고 함경북도 온성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녀는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소설가 박화성의 소개로 카프 창립자이며 사회주의 계열의 유명한 문예운동가인 김복진을 만나 결혼했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던 1940년 남편 김복진이 사망했는데, 이후로 조선총독부의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여성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가 되었다.
1942년 《조광》 주최의 시국 좌담회에서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며 이에 적극 호응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고, 같은 해 〈총후부인의 각오〉라는 친일 논설을 《대동아》에 기고했다. 전시 체제를 맞아 친일 여성 인사를 총망라해 구성한 조선임전보국단 부녀대에도 참여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좌우 합작의 여성 단체인 건국부녀동맹을 결성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전국부녀총동맹 제2부총재를 맡으며 좌익 계열의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이 되었다. 이후 1946년 월북하여 행방을 모른다[1]는 설과 한국 전쟁 초기에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가 후퇴한 뒤 좌익 활동 경력 때문에 살해되었다[2]는 상반된 설이 있다. 전국부녀총동맹 총재 유영준과 제1부총재 정칠성은 모두 월북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가족 및 친척 관계
[편집]- 남편: 김복진(金復鎭, 1901년 11월 3일-1940년 8월 18일, 연극배우, 조각가, 미술평론가, 문예이론가, 사회운동가.)
- 시동생: 김팔봉(金八峰, 1903년 8월 21일~1985년 5월 8일, 본명 김기진(金基鎭).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 시조카딸: 김복희(金福姬, 1928년 3월 31일~ , 소프라노 성악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김팔봉의 딸.)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다도아트갤러리, 正觀 김복진서거 55주기 기념 조각전에 대해
- 이선옥 (2004년 4월 27일). “청산해야할 역사적 기억 - 친일문학 새로 보기 [여성지식인의 친일논설과 작품]”. 컬처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