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탁
안희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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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본명 | 안병모(安丙模) → 안희정(安禧禎) → 안희탁(安禧鐸) |
출생 | 1912년 4월 6일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도 남원군 운봉면 동천리 484번지 |
사망 | 1935년 3월 30일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동천리 484번지 | (22세)
거주지 |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동천리 |
국적 | 대한제국 |
본관 | 순흥(順興) |
직업 | 항일 독립 운동가 |
학력 | 경기인천고등상업학교 2학년 중퇴(1926년) |
형제 | 형 안범모(安範模) |
배우자 | 없음 |
자녀 | 없음 |
활동 정보 |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활동 기간 | 1931년 1월~1934년 12월 |
주요 활동 | 사회주의 농민 운동 전개자로 앞장 섬. |
경력 | 전북남원청년동맹 운봉지부 간사장 |
상훈 |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1995년 8월 15일) |
웹사이트 | 안희탁 : 독립유공자 공훈록 - 국가보훈처 |
안희탁(安禧鐸, 1912년 4월 6일~1935년 3월 30일)은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관련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전북 남원(南原)의 토박이 출신이다.
생애
[편집]1912년 4월 6일, 전북 남원 지역의 쇠락한 중농 농가에서 안병모(安丙模)라는 이름으로 출생했으나, 1915년(4세 때)에 안희정(安禧禎)으로, 1916년(5세 때)에 안희탁(安禧鐸)으로 거듭 개명(改名)했다.
1931년 1월 당시에, 임철호(林喆鎬)·박종암(朴鍾岩) 등과 전북남원청년동맹(全北南原靑年同盟)의 운봉(雲峰) 지부를 조직하여 불경작동맹(不耕作同盟)과 소작료불납동맹(小作料不納同盟)을 결성하는 등 항일 농민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청소년의 이발을 무료로 해준다는 것을 내세워서 운봉 이발계(理髮契)를 조직하고, 그 이면으로 사회주의 사상 등을 전파하면서 항일 의식을 고취해 갔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힘입어 전북남원청년동맹 운봉지부가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매월 15일 정기총회를 개최하면서 일제의 토지 수탈 등에 대항하였다.
그런데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전북남원청년동맹 운봉지부의 활동이 부진하게 되자, 운봉지부의 활동을 부흥시키고자 박종암·임철호 등과 모두 함께 모의 하에 청소년들을 포섭하여 비밀리에 민족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조직 개편을 단행하였다. 바로 이 때 그는 박종래(朴宗來)와 함께 서무부·재무부 책임을 맡았다.
이후 그는 전북 남원 운봉면 일대에서 수십 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전북 남원 야학회〉를 개설하여 대한제국 농촌의 피폐는 일제 식민지 통치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제의 구축과 식민 권력에 안주한 친일 지주와 부패한 자본가에 대한 배척을 역설하였다. 이렇듯 야학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던 중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힌 그는 1933년 5월 31일 경북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충남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34년 11월 30일 만기출감했다. 그러나 고향으로 귀거한 그는 지병(폐병)의 급속한 악화로 인해 1935년 3월 30일 하세했다.
사후
[편집]-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5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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