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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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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산문(桐裏山門) 또는 동리산파(桐裏山派)는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성립된 선종 구산의 하나이다.[1][2]

신라 문성왕(文聖王) 원년(839)에 혜철(惠哲 혹은 慧澈)이 귀국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사(泰安寺)에 동리산파의 선종을 개산하였다.[3] 개산조 혜철은 속성이 박씨이며 경주인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처음 부석사(浮石寺)에서 화엄(華嚴)을 배웠다.[3] 헌덕왕(憲德王) 5년(813)에 입당(入唐)하여 서당지장(西堂智藏)으로부터 선법(禪法)을 배워 인가를 받았다.[3] 26년간이나 당에 있었으며 문성왕 1년(839)에 귀국하여 태안사에서 교화에 전력을 다하다 경문왕 1년(861) 77세로 시적(示寂)하였다.[3] 시호는 적인(寂忍)이다.[3]

그 문하에 도선(道詵) · 여(如) 등 수백 인의 제자가 있어 동리산의 선맥을 유지, 현양하였다.[3] 특히 도선은 15세때 구례 화엄사(華嚴寺)에서 득도하여 화엄경을 수업하다가 동리산 혜철에 입시하여 무설지설(無說之說)과 무법지법(無法之法)을 품수받아 견성하여 동리산을 영도하였으며, 도선의 제자 중 경보(慶甫)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추앙을 받아 종풍을 선양하였다.[3]

이상 혜철 · 도선 · 경보 등은 모두 화엄종 사찰에서 득도한 다음 선종법(禪宗法)을 계승하였으므로 후세에 와서도 동리선사(桐裡禪寺)와 화엄강사(華嚴講寺)와는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3]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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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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