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측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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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물 | |
종목 | 대한민국의 보물 (구)제844호 (1985년 8월 9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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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 1기 |
시대 | 조선 정조 6년(1782년) |
소유 | 국유 |
관리 | 국립고궁박물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 국립고궁박물관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창덕궁 측우대(昌德宮測雨臺)는 본래 창덕궁 금문원(檎文院)에 설치되었던 측우대로, 직경 16.2cm, 길이 4.3cm의 구멍이 파여 그 안에 측우기를 앉혀 놓게 되어 있는 대(臺)이다.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1]
역사
[편집]본래 창덕궁 금문원(檎文院)에 설치되었다가 1920년경 경성박물관 앞 계단으로 옮겨 전시하였다가, 6·25전쟁 때 측우기는 없어지고 측우대만 남아 창경궁 명정전(明政殿) 뒤에 전시되었다. 이후 1960년 말에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겼다가 1970년 후반에 영능 전시관[2]으로 옮겼고, 현재는 서울특별시 중구 궁중유물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명문
[편집]자체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조선 정조 6년(1782년) 6월과 7월 사이에 계속된 가뭄에 비가 오기를 기원하고 기다리며 이를 제작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명문은 심염조(沈念祖)가 찬(撰)하고 정지검(鄭志儉)이 썼다.
측우대
[편집]측우대 [A]는 내린 비의 양을 재는 철제의 측우기를 올려놓던 대를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세종 때에 측우기를 만들어, 이전까지 땅에 스며든 물의 양을 측정하는 비과학적인 방법을 개선하였다. 즉 표준화된 측우기를 통하여 강수량을 계량적으로 측정하였고, 측우기를 전국적으로 보급하여 강수량을 전국 단위로 기록하였다.
세종 때부터 본격화된 측우기의 제작과 보급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주춤하였다가, 조선 후기의 영조 때에 다시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사진
[편집]각주
[편집]- 내용
- 출처
- ↑ 관보 제10111호 1985년 8월 9일. 5-6쪽. 5쪽. 문화공보부고시제645호. 국보및보물지정. 문화공보부장관. 2016년 5월 20일 확인함.
- ↑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 83-1(영능전시관)에 소재하고 있다.
- ↑ 대구 선화당 측우대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