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부(留守府)는 고려조선 시대에 옛 도읍지나 행행지 및 군사적인 요지에 설치되었던 행정 기관으로 가운데 유수(留守, 종2~정2품)가 우두머리로 있는 곳을 가리킨다. 조선 시대에는 강화·개성·수원(화성)·광주(廣州) 등에 설치되었다.

도읍지인 한성부를 제외한 지방 관직은 인사 행정에 있어 외관직(外官職, 지방 관직)으로 분류되나, 유수부는 경관직(京官職, 중앙 관직)으로 운영하였다. 또 유수는 관직에 설정된 2품 품계보다 높은 관원이 부임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특히 수원유수, 광주유수는 의정부의 정1품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지낸 인물을 임명하기도 하였다.[1] 대표적인 예가 1788년(정조 12년)에 우의정, 1790년(정조 14년)에 좌의정을 거쳐 1793년(정조 17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초대 화성유수(수원유수)가 된 채제공(蔡濟恭)이다.

주요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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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38년(세종 20년) 10월, 개성부(유후사)를 개성유수부로 개편[2]
  • 1627년(인조 5년) 4월, 강화부(부윤)를 강화유수부로 승격[3][4]
  • 1638년(숙종 9년) 1월, 광주목을 광주유수부로 승격 (남한산성 수어사 혁파)[5]
  • 1793년(정조 17년) 1월, 수원도호부를 정2품 화성유수부로 개칭 승격[6]
  • 1795년(정조 19년) 8월, 광주목을 정2품 광주유수부로 재승격[7]
  • 1888년(고종 25년) 4월, 춘천도호부를 춘천유수부로 승격[8]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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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 6권 1854년(철종 5년) 3월 25일 기사 약원의 입진과 차대를 행하다
  2.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83권 1438년 10월 15일 기사 의정부에서 개성 유후사를 개성부로, 유후·부유후를 유수·부유수로 고칠 것을 아뢰다
  3. 강화부에는 유수 관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1618년(광해군 10년)에 부윤이 임명되는 강화부로 개편되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초본 46권 1618년 6월 8일 기사 강화 유수의 명호를 부윤으로 개정하는 일을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전교하다
  4.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6권 1627년 4월 2일 기사 비국이 관직을 맡았었고 일에 익숙한 사람을 강화에 유수·낭청으로 뽑도록 청하다
  5. 이후 영조 시대에도 부윤, 유수부로 고을 등급이 변동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14권 1638년 1월 28일 기사 주강에 나아가니 송시열이 수어사 혁파와 12조목의 차자를 올리다
  6.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37권 1793년 1월 12일 기사 수원부를 화성으로 바꾸고 부사를 유수로 승격시키다
  7.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43권 1795년 8월 18일 기사 수어경청을 혁파하고 광주부를 승격시켜 유수를 두다
  8.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25권 1888년 4월 19일 기사 군제에 대한 절제와 규식을 각 영의 장신들이 총리대신에게 취의하여 절목을 만들어 들이도록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