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일신
권일신(權日身, ? ~ 1791년)은 조선의 천주교 지도자로서, 세례명은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이며, 순암(順菴) 안정복의 사위이다. 양근(楊根) 출신이다. 이승훈과 함께 서울 명동에서 있었던 신앙모임인 '명례방공동체'에서 활동을 하고 자치교회를 운영하였다. 중국 교구의 구베아 주교로부�� 제사금지령을 하달받은 후에도 배교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다. 1791년 신해박해로 구속된후 노모의 간청으로 배교함에 따라[1][2] 감형되었으나 유배지로 이동중에 고문의 후유증인 장독(杖毒)으로 죽었다.[3]
생애
편집어린 시절
편집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성오(省吾), 호는 이암(移菴)이다. 할아버지는 대군사부를 지낸 권적(權蹟)이고, 아버지는 권암(權巖)이다.[4] 모친은 풍산 홍씨이고, 성호좌파를 대표하는 학자인 권철신은 그의 형이다. 증조부때 갑술옥사로 인해 관직을 잃고 낙향하여 양근 땅에서 살았다.[5] 남인 출신으로 조부인 권적이 인조 때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 배향을 비판하는 논의를 주도하여 그의 가문은 노론과 소론 모두에게 견제를 받았다.[6]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안정복의 문하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했으며, 안정복의 딸인 광주 안씨와 결혼했다.
천주교 입교
편집성호 이익의 제자인 정약전·정약용·권철신·이덕조(李德祖) 등과 함께 1777년(정조 1)부터 천진암과 주어사에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는 신앙 운동을 전개했다. 1783년(정조 7) 동지 이승훈이 그의 아버지 서장관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봄에 영세를 받고 돌아왔다.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이벽은 권철신과 같은 학덕이 높은 학자를 포섭하여 천주교의 기반을 굳힐 생각을 품게 된다.[7] 이에 1784년 9월(음) 먼저 양근에 사는 권씨 가문을 찾아가 입교를 권고하였다. 셋째인 권일신(權日身)은 즉시 입교하였고 맏이인 권철신은 처음에는 좀 주저했으나 결국 입교하여[8] 이벽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9] 1785년(정조 9) 이승훈의 주재(主宰)로 한양 명례동(明禮洞 : 명동) 김범우(金範禹) 집에서 열린 집회에도 참여하며 신앙모임인 '명례방공동체'에서 활동하였다.
전교활동
편집세례를 받은 후 권일신은 형인 권철신과 달리 열렬한 전도자가 되어 전교에 매우 열정을 불태웠다. 권일신은 중인이던 이단원을 전교했는데, 천안 출신인 이단원은 충청일대를 전교하여 훗날 조선 천주교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충청 내포 지역 천주교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권일신은 충청도 아산 출신 이존창과 전주 출신의 유항검을 입교시켜 이 땽에 중인들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의 한 획을 긋게 만들었다.[10]
1787년에 가성직 제도를 수립할 때 주교 이승훈에 의해 사제로 선임되었지만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는 평신도로 돌아감과 동시에 베이징에 사람을 보내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했다.[11][12] 1791년, 중국에 밀파되었던 윤유일이 귀국하여 제사금지령을 전하자 이승훈은 고민끝에 배교하였으나[13] 권일신은 잔류하여 전교활동을 하였다. 집안과 이웃에 열심히 전도하여 그 문하에 이존창(李存昌), 유항검(柳恒儉) 등 열렬한 신자가 나왔으며, 양근 일대(현 양평)에 열심히 전도하여 당시 그곳을 서학(西學)의 요람이라 하였다.
신해박해
편집1791년(정조 15) 신해박해로 권상연(權尙然)·윤지충(尹持忠) 두 신자가 잡혀간 후 그도 이승훈과 함께 서학책을 간행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승훈은 이미 배교했다는 변론이 수용되어 석방되었으나 관직은 박탈당했다.[14][15] 권일신은 노모의 간청으로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배교함에 따라[1][2] 귀양지가 제주에서 예산으로 변경되었으나 예산으로 이동중에 고문의 후유증인 장독(杖毒)으로 죽었다.[3] 형인 권철신은 동생의 죽은후 슬픔에 빠져 문을 닫아걸고 10여 년 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16]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네이버 지식백과] 권일신 [權日身] (두산백과)...권일신은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으나 노모의 회유로 옥중에서 회오문(悔悟文)을 쓰면서 예산(禮山)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 ↑ 가 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권일신(權日身)...유배지로 출발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매부 이윤하(李潤夏)의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행장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정조의 명령을 받은 별감이 와서 당시 80세가 된 어머니와 유배지인 제주의 거리를 다시금 환기시키며 천주교와 유교에 대한 애매한 글귀를 내놓고 수결(手決)주 02)하기를 권하자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유배지가 예산으로 바뀌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달레(Ch. 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부모에 대한 지나친 인성적(人性的) 사랑 때문에 배교했다고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 ↑ 가 나 [네이버 지식백과] 권일신 [權日身] (두산백과)
- ↑ [네이버 지식백과] 녹암 권철신 묘지명 - 1-2 [鹿菴權哲身墓誌銘] (여유당전서 - 시문집 (산문) 15권,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
- ↑ [네이버 지식백과] 권철신 [權哲身] (두산백과)
- ↑ [네이버 지식백과] 권일신 [權日身] (두산백과)
- ↑ [네이버 지식백과] 녹암 권철신 묘지명 - 1-2 [鹿菴權哲身墓誌銘] (여유당전서 - 시문집 (산문) 15권,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이벽(李檗)3)이 처음 서교(西敎)를 선교할 때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렇게 말했다. “감호(鑑湖, 권철신)는 선비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니, 감호가 따른다면 따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벽이 수레를 타고 감호에 이르러 10여 일을 묵은 뒤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때 공의 동생 권일신(權日身)이 열심히 이벽을 따르자...(이하생략)
- ↑ [카톨릭 사전] 권철신 (權哲身, 1736년 ~ 1801년)
- ↑ [네이버 지식백과] 권철신 [權哲身] (두산백과)
- ↑ 이덕일 外2인 <한국사의 천재들> 생각의 나무 2006년 p253
- ↑ 이덕일 (2009) 441쪽. "이승훈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북경 교회 체제를 인용해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權日身, 정약전 등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해 교회를 운영해 나갔는데, 이를 정식 신부가 맡은 체제가 아니라는 뜻의 가성직 체제라고 한다."
- ↑ 〈권일신〉. 《두산 엔싸이버 백과사전》. 2016년 2월 8일에 확인함.
...권일신·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이 사제로서 각 지역에서 성사를 집전했다. 하지만 평신도가 성사를 집전해서는 안 된다는 교리서의 내용을 근거로 가성직제도에 의문이 제기되자, 권일신은 베이징의 주교인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湯士選)에게 조상 제사와 가성직제도에 관한 교리 해석 등을 부탁하는 편지를 써서 1789년 10월 동지사(冬至使) 일행으로 베이징으로 간 윤유일(尹有一)을 통해 전달했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한국민족 문화 대백과사전] 이승훈(李承薰)
- ↑ 정조실록 1805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번째기사
- ↑ 정조실록 1805 33권, 정조 15년 11월 3일 갑술 2번째기사 " 그 아버지의 사행(使行)에 따라가 수백 권의 사서(邪書)를 널리 가져와 젊고 가르칠 만한 사람들을 그르친 자가 있으니, 바로 평택 현감 이승훈이 그 사람입니다. "
- ↑ [네이버 지식백과] 녹암 권철신 묘지명 - 1-2 [鹿菴權哲身墓誌銘] (여유당전서 - 시문집 (산문) 15권,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
참고 문헌
편집- 이덕일 (2009). 《이덕일의 세상을 바꾼 여인들》. 옥당. ISBN 978-89-961525-2-1.